한겨울의

수박화최

한겨울의 수박화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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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서지는 파도가 눈꽃처럼 하얗다. 푸르게 질린 바닷물이 땅과 부딪힐 때마다 하얀 눈꽃송이가 차곡차곡 쌓였다. 얼마 못가 파르르 녹아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잠시 존재하는 그 찰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화평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특별할 것 없는 바다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가져온 스케치북과 연필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내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매번 다른 형태로 밀려와 다른 흔적을 남기는 파도. 그가 걸어올 때면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한 발소리가 울린다.


무릎이 조금 시렸다. 허공에 우뚝 멈춘 양 손등도 차갑다.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날씨가 그렇지. 추울 수밖에 없지. 그런 태연한 생각을 하며 또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푸른 바닷물 위를 빨간 노을이 불태울 때까지. 그래서, 검은 잿더미가 바다 속에 섞일 때까지 계속.


“저기요.”


툭. 툭. 뭉근한 바다의 발자국 소리 위로 그보다 가벼운 발소리가 겹쳐 들었다. 화평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도 함께였다. 고개 돌리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추위를 무시하고 서 있었더니 몸이 살짝 얼었나보다. 두툼한 점퍼를 껴입은 남자가 한 손을 앞으로 내민다. 아. 뾰족한 연필심이 반으로 동강 부러진, 4B연필 하나. 분명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트렸나보다. 


받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바싹 얼어붙은 시선을 뚝, 뚝, 부자연스레 움직이며 남자를 훑어본다. 회색 터틀넥 니트 아래 청색 앞치마를 둘러맨,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


“더 서있으면 진짜 동상 걸려요.”

“예뻐서요. 겨울바다 엄청 좋아하거든요.”


남자의 시선이 화평의 손으로 향했다. 그제야 들여다 본 제 손은, 빨갛다 못해 검붉게 타들어가고 있더라. 잔뜩 곱아버린 손가락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진짜 오래 서 있긴 했나보다. 머쓱하게 웃는 화평을 빤히 보던 남자가 “볼 거면 따뜻한 곳에서 보세요. 바쁘시면 말고요.” 뒤돌아 서 먼저 걷는다.


바다를 앞마당으로 둔 2층짜리 통나무 집. 살짝 열린 문틈으로 따뜻한 주홍빛이 한가득 쏟아지고. 그 안으로 작아진 남자의 모습이 녹아들 듯 사라졌다.


굳어버린 발을 움직여 터벅터벅 그곳으로 걸었다. 밖으로 내놓은 입간판도, 테이블도 없어서 사람 사는 곳인지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signpost] 란 아주 작은 간판 하나가 벽면에 붙어 있었다. 장사할 마음이 없나보네. 젊어 보이던데. 부잔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남자를 집어삼킨 출입문을 얼어붙은 몸으로 힘겹게 열었다.


-


건더기 없는 유자차.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이곳 사장님은 화평의 입맛을 알아도 너무 잘 안다. ‘건더기 안 먹게 생겼어요.’ 왜 건더기 안주냐 물었더니 꽤나 새침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라. 여기서 카페 하지 말고 어디 산에 올라가서 돗자리나 피라고. 웃음기 섞인 농담은 머그잔의 물기 닦는 걸로 가볍게 무시하는 사람. [signpost]는 저런 사람이 바리스타 겸 사장 겸 직원인 카페였다.


동상으로 죽을 뻔한 자신을 건저다 구해준 것을 시작으로, 화평은 이 바다 앞 통나무 집 카페를 꽤나 자주 찾았다. 얼마나 자주 왔냐면, 일주일에 일곱 번. 이곳에 내려온지 오늘로 꼭 10일 째 됐으니까 처음 3일 빼곤 정말 매일 온 셈이다.


작은 테이블 다섯 개. 한쪽 벽을 차지한 벽난로. 그 앞에서 한가로이 흔들리는 흔들의자와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둔 도톰한 담요더미. 짙은 회색 바(bar) 너머에서 혼자 분주한 바리스타 겸 사장 겸 직원인, 최윤. 아무리 봐도 작지만 단단하게 응집된 느낌을 주는 이곳이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호텔 카페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나오는 음료도 하나같이 다 제 스타일 이었고.


건더기 없는 유자차, 우유를 많이 부어 밍밍한 맛이 나는 코코아, 샷을 추가해 아주 진한 맛이 나는 아메리카노…


“서울에서 의사했다고 했지?”

“네.”

“점쟁이가 아니라?”

“또 무슨 이상한 소리에요.”

“얼굴만 보고 딱 메뉴를 맞추잖아. 이게 점쟁이가 아니면 뭐야.”


화평은 반절 정도 빈 제 머그잔을 들여다보았다. 그 흔한 유자 껍질 한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유자차. 지금까지 세상 어느 카페를 가도 건더기 빼달라는 말을 먼저 하기 전에 알아서 빼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가라앉은 건더기까지 긁어먹으라며 숟가락을 주면 줬지.


“건더기 들어간 유자차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거기에 맞추다 보니까, 계속 그렇게 타게 되더라고요.”


벽난로 안으로 장작 몇 개를 추가한 그가 바닥에서 잠든 고양이를 조심히 안아 의자 위로 올렸다. 잠시 뒤척이던 털뭉치는 금세 편한 자세를 잡고 도로 잠에 든다. 화평은 습관적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타다닥- 마른 장작의 겉부터 조금씩 좀먹어가는 불꽃이 그의 얼굴도 함께 좀먹고 있다. 빨간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선 얇은 얼굴. 섬세한 선 몇 가닥을 갈색 동공이 빠르게 훑고 지난다.


“근데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야? 나만 말 놓고 있네.”

“전 이게 편해요.”

“나만 이상한 놈 같아서 별론데.”

“아시면 됐고요.”


농담 삼아 말 놓자고 했는데, 어느새 저만 반말을 하고 있더라. 동갑이니 편하게 굴면 좋지 않냐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도 그래도 손님한테 반말은 싫다고 철벽이다. 참 딱딱한 사람이야. 테이블에 턱을 괸 채 혼자 바쁜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 카페 안에서 할 일이 뭐 그리 많다고 저리 바쁜지.


“아아- 가야되는데 움직이기 귀찮다.”

“빨리 가세요.”

“와, 손님 내쫓는 거야?”

“그림 그려야 된다면서요.”

“조금만 더 있다가…”


조용하고 아늑해서 그런지 한 번 엉덩이를 붙이면 나갈 생각이 들질 않았다. 원목 테이블에 엎드려 그의 부산스런 움직임이 내는 소음을 듣다보면 나른하게 잠기운까지 온다. 우연찮게 발견한 것치곤 인테리어나 음료 맛이나 뭐 이래저래 괜찮은 카페였다.


“드세고 가세요.”


그중에서도 제일 괜찮은 건 조막만한 귤 몇 개와 물티슈 하나를 무심하게 놓고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그였다. 바리스타 겸 사장 겸 직원. 최윤.


-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이건 꿈이구나. 꿈이 아닌 이상 어머니가 제 두 번째 전시회에 오셨을 리 없다.


그녀는 급작스레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 해 일평생 해본 적 없던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많이 여렸던 분이었다. 아침이면 단정하게 머리칼을 쓸어 올린 채 높은 구두를 신고 출근길에 오르셨고, 저녁이면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셨다. 하나뿐인 아들에겐 아무걱정 말고 외국에 나가 그림이나 그리라 엄포를 놨으나 속으론 휑한 집이 너무 무섭다고, 네 얼굴이 보고 싶다는 말을 수백 번 삼키셨을 것이다.


화평의 첫 전시회는 오로지 그런 어머니께 바치는 감사와 사죄, 존경의 표시였다. 메인 그림으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높다란 회사 건물 앞에 선 어머니의 뒷모습을 연작으로 그렸는데, 끝내 그 그림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셨다.


전시회가 끝나고 작은 소규모 파티가 있었다. 갤러리 측에서 열어준 기념 파티였으나 화평은 샴페인 잔을 드는 대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가로운 퇴근길에 나섰다. ‘오늘은 우리 여사님이랑 데이트 하려고.’ 손수 안전벨트를 해주며 그렇게 말하자 퍽 기쁘게 웃으셨다. 못 본 사이 주름이 깊어진 눈가가 예민한 예술가의 눈썰미를 파고들었고. 외국 생활을 접어야겠단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학교는 일찌감치 끝냈으니 짐을 정리하고 아예 한국으로 들어오자고.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들을 돌렸던 것 같은데… 일순간 눈앞에 감당할 수 없는 섬광이 들어찼다. 눈이 너무 시려 아주 잠시 감은 그 순간이 제 눈으로 어머니를 본 마지막 순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머니란 말 보다 엄마- 하면서 팔짱을 낄 때 유독 환하게 웃었던, 나의 영원한 뮤즈.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을 만나러 발길마다 꽃잎을 가득 뿌리며 떠난, 나의 어머니.


깊은 수마는 제 삶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먹어치움과 동시에 노쇠한 어머니까지 꿀꺽 삼킨 것이다.


뻑뻑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곳은 온통 다 시꺼멓기만 했다. 병실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와 같다. 손을 뻗어 한참 만에 찾은 핸드폰은 [AM. 4:30] 눈을 뜨기엔 너무 이르다 말한다. 스읍- 폐를 부풀려 일부러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부풀었던 가슴팍이 쪼그라드는 감각을 머릿속에 상기해 본다. 의식적으로 숨을 마시고 뱉고, 마시고 뱉고. 그럴수록 목구멍이 칼칼해짐과 동시에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약 몇 개를 우드득 씹어 먹고 피곤한 눈두덩을 손으로 비볐다. 움직일 기력이 없어 호텔 내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켰으나 영 손이 가질 않았다. 모든 게 너무 부산스럽고 쓸데없이 가득 찼다. 예민하게 날 선 신경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직원들의 발소리, 넓은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의 온도- 그런 것들이 끝임 없이 부딪히고. 꽂히고. 찢어지고. 딱 한 모금 마신 커피잔을 그대로 둔 채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뜨거워요.”

“… 나 커피 시켰는데.”

“모과차에요. 피로 회복에 좋아요.”


도피처마냥 찾은 곳은 그 통나무집 카페였다. 파도의 철썩임만 가득한 그곳에서 화평은 오늘 처음으로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부산스럽지도, 무언가 가득 차 있지도 않은, 정말 조용하게 빈 그곳. “피곤해 보여서요.” 주문한 커피 대신 노란 차 한 잔을 들고 온 최윤이 그걸 화평의 앞에 내려 둔다. 기분 좋은 과일향이 코끝을 톡톡. 도톰한 회색 니트 차림의 그는 그걸 내려놓곤 금세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잠을 잘 못 잤어.”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쌌다. 손바닥이 따끔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온다. 고집스레 그걸 손으로 잡고 꿋꿋하게 버텼다. “완성해야 하는 그림이 많은데…” 상대에게 말을 한다기보단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였다. 상대방도 제 말에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달그락, 부스럭, 그런 작은 소음들 사이로 화평의 목소리가 눌리고. 찢기고. 껴들고. 그럼에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이번 전시회 날짜를 어머니 기일로 맞췄거든. 근데 그때 열 수 있을지 모르겠네. 진도가 영 안 나가. 없는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려니 그런가봐.”

“사고 이후에 기억이 없다고 그랬죠?”

“완전히 없는 건 아니고. 드문드문 잘린 거지. 에휴…. 머리가 영 아프네.”

“… 혹시 일출 본 적 있어요?”


꽃가지가 섬세하게 그려진 접시에 쿠키 몇 점을 담아 온 그가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죽어가는 해의 마지막 유언이 바다 위로 흩뿌려 지고 있다.


“여기 앞에 일출 잘 보이는 곳이 있거든요.”


손바닥에 가벼운 화상을 입은 것 같다. 빨갛게 익은 살갗이 따끔거린다. 버터맛 쿠키가 입 안에서 와그작와그작 부서지고. “내일 시간 괜찮으면 일출 보러 안 갈래요?” 최윤의 목소리도 귓가에서 와르르 부서져 내린다.


해의 시체를 끌어안은 바닷물. 가까이서 올려다 본 그의 얼굴. 까만 눈동자. 가느다란 얼굴선을 따라 흐르는 은은한 형광등 불빛.


“… 어. 데려가 줘.”


어딘진 몰라도 이 조용한 남자와 함께 간다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결정은 참 쉽게 했는데, 실행은 왜 이렇게 힘든지. 산길로 들어선 순간 편한 운동화를 신고 오길 잘했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직 이슬도 맺히지 않은 시간. 이곳에 살아있는 것의 흔적이라곤 둘의 발자국 소리 뿐이다.


높은 산 중턱에서부턴 사람의 길이 아닌 곳으로만 걸었다. “나 어떻게 처리하려는 속셈은 아니지?” 길이 어찌나 험한지 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등불 삼아 걸으려니 발끝엔 절로 힘이 바짝 들어가고, 손은 곧게 뻗은 나무들을 잡게 되더라. “제가 화평씨 처리해서 무슨 이득이 있어요.” 앞서 가던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돌아본다. 새벽이슬이, 사람 얼굴에도 내리던 거였나.


“다 왔어요.”


겨우 절벽 끝에 다다랐을 때 어린 해가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빼꼼 튀어나온 손끝이 까만 이불을 밀어내고 있다. 차가운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생의 첫 일출을 보았다. 새로운 하루가 탄생하는 순간. 새 생명이 주는 경이로움. 온 얼굴이 해의 우렁찬 울음소리로 물들 때까지 추운지도 모르고 내내 앉아있었던 것 같다.


“마셔요.”

“어어. 고마워.”


아름다웠다. 갓 태어난 해의 모습과 그것이 품은 빛. 가슴께를 일렁이게 하는 묘한 경험이었다. 그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종이컵에 담아 내민다. 추위로 곱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따뜻한 열기가 퍼졌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찾아다니다가 발견했어요. 아마 저만 아는 곳일걸요.”


그가 탄 커피에선 늘 은은한 단맛이 났다. 혀끝을 짜릿하게 하는 자극적인 맛은 아닌데, 마시고 나면 입안이 달았다. 아마 이 맛이 그의 취향이겠지. 한 모금 크게 들이키곤 완전히 해가 뜬 산속을 눈으로 쭉 둘러본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바위덩이. 마치 고립된 것처럼 덩그러니 앉아있는 저와 최윤.


“누군데. 여자친구?”

“남자친구요.”

“어.”

“놀랐어요?”


덤덤한 말투로 꽤나 큰 폭탄을 던지는 그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인가 싶다가도 지금처럼 정말 무거운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버린다. “어…” 화평의 입술이 뻐끔뻐끔 거리는 걸 봤는지 그가 눈가를 구기며 푸스스 웃었다.


“흔한 일은 아닌데 뭐… 우리 쪽에선 특이한 일도 아니지. 대학교 때부터 오픈하고 다니는 애들도 많았고…”

“그럼 다행이고요.”

“어떤 사람인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이미 물어봐놓고 물어봐도 되냐고 하시네요.”

“예의상 덧붙인 말이야.”


목도리를 조금 느슨하게 푼 그가 화평의 종이컵을 도로 채워준다. 빨갛게 익은 손끝으로 시선이 쏠렸다 흐트러진다.


“떠날 거라 생각은 했는데… 진짜로 떠난 사람이요.”

“기다리는 중인가 보네.”

“…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겨울바람이 순간 세차게 불었다. 눈이 시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찬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은 뺨이 따끔하다. 바람이 차가운 건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이 화평의 쪽으로 돌아서 있다. 가늘게 뜬 시선이 부딪힌다.


말리고 덧입히고 말리고 덧입히는 작업을 세 번은 해야 할 거라고. 그의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한 번의 색칠로는 그 깊이를 재현해 낼 수가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색인가. 기다림을 몇 번이나 덧입었기에 저렇게 깊을까.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따라 그려보았다. 흩날리다 겨우 가라앉은 머리카락부터 빨갛게 튼 얼굴. 목도리 아래에 가려진 부분까지 전부 다. 아무리 스케치를 떠 보아도 눈만큼은, 완성할 수가 없었다. 기다림을 덧입은 눈동자. 그걸 가린 기다란 속눈썹.


“기다리다보면 오겠죠.”


오지 않으면 어떡할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시린 바람이 말을 꽁꽁 얼린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만 연거푸 들이켰다. 분명 달았는데. 식어서 그런지 입안은 쓰기만 했다.


-


밤을 샜으나 기분만은 아주 상쾌했다. 메인 그림의 마지막 붓질을 끝낸 밤이니 그럴 만도 했다. 바람이 통하는 곳에 캔버스를 내려놓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아침 8시도 안된 시간. 화평의 걸음은 그곳으로 향한다. 밍밍한 코코아와 건더기 없는 유자차를 내어주는 그 카페로.


겨울바다의 아침치곤 바닷물도 잔잔했다. 오늘따라 바람도 조용한 것 같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모든 게 다 완벽해 보였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길 반복하는 파도를 눈 속에 담으며 모래사장 위를 걷는다. 자글자글한 모래보다 단단한 돌바닥의 감촉이 더 크게 느껴질 때 즘이면, 아담한 통나무집의 기둥과 판자를 덧대어 만든 다섯 개의 계단이 나타났다.


제가 올 줄 알았나. 가벼운 차림의 그가 계단 위에 서 있다. 이젠 제법 친근해진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가, 찬 공기만 잔뜩 머금은 채 입을 다문다.


“사진도 찍어?”

“일찍 오셨네요. 아직 카페 문 안 열었어요.”

“이런 손님이 어디 있어. 기다렸다가 커피 사는 손님.”

“그러게요. 이런 진상 손님이 어디 있겠어요.”


새하얀 즉석사진기와 아직 색감이 덜 익은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그걸 양 손에 든 그가 화평을 향해 반가운 눈짓을 한다. 찬 공기 속에서 하얗게 질려가는 사진 속엔 역시나 뿌연 물거품 머금은 바다의 시간이 한 조각 담겨 있었다.


그가 커피머신을 깨울 동안 불씨가 죽은 벽난로 안에 장작을 한가득 채웠다. 어설프지만 불을 붙이고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도 모두 닫았다. 웅, 웅, 작은 소음과 함께 기계들이 돌아간다. 타다닥- 마른 장작과 불씨의 처절한 싸움이 만들어 낸 하모니도 함께 들렸다.


제자리에서 발을 굴려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주는 편안함. 거슬리지 않는 소음들 사이에, 거슬리지 않는 한 사람의 온기. “커피 드실 거죠?” 진청색 앞치마를 허리께에 둘러 맨 그가 화평에게 묻는다. 이 완벽한 조화를 깨트리기 싫어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은 잘 돼가요?”

“너무 잘 돼. 방금까지 그리다가 왔어.”

“손만 봐도 알겠네요.”

“아… 뭐, 화가의 훈장이지. 훈장.”


연보라색 커피 잔 안엔 역시나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가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다. 뜨겁다는 말을 꼬리표처럼 단 잔을 조심히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그거 시간 지나면 잘 안 지워지잖아요.”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손가락 위에 그의 시선도 덕지덕지. “귀찮아. 두면 지워지겠지.” 장난스레 손끝을 움직이며 웃어 넘겼으나, 어느새 깨끗한 행주를 뜨거운 물로 적셔온 그다.


“직업 너무 티내는 거 아니에요?”

“보였어?”

“조금요.”


맞은편 나무 의자가 끼익- 사이를 벌리고. 그 벌어진 틈을 그의 존재가 채웠다. 가볍게 손목을 잡아 제쪽으로 끌고 가선 손가락 하나하나 닦아주는 그다. 따끈한 천조각이 손끝을 감싸고, 비비고, 긁어내고. 그때마다 퍼지는 온기가 정신없이 전신으로 스며든다. 화평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크게 마셨다. 그 온기가 어디로 퍼지는지 스스로 가늠할 수 없게.


“그림 그렸어?”

“저 말고요. 그 사람이 가끔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굳은 물감을 닦아주는 그의 모습이 하나의 스케치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이 가린 얼굴.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


“그 사람 얘기 좀 해봐.”

“남의 애인이 왜 궁금해요.”

“… 재밌잖아.”


아직도 식지 않은 커피 잔이 뜨겁다. 그에게 내어준 손도 뜨겁다. 어느새 훈훈하게 데워진 카페의 공기도 뜨거웠다. 그를 보는 시선 역시 너무 뜨거울까봐 부러 창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광택 잃은 물비늘 속에 화평의 시선이 꽂힌다.


.

.

.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별 이유 없이 좋대요. 나중에 늙으면 바다 앞에 집을 짓고 살 거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있는 돈 다 털고…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다 정리하고 내려왔어요. 그 사람 기다리려고요. 기다리는 동안 심심할까봐 바리스타 일도 배웠고요. 그 사람, 바다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했거든요. … 그러게요. 이렇게 보니까 좋아하는 거 많은 사람이네. 그 사이에 나도 있었겠죠. 아, 그래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 있는 카페를 차리고 싶었어요. 그럼 언젠간 올 것 같아서요. … 올 거예요. 오겠죠. … 올 때까지만 있어보려고요.


-


까마득하게 깊고 넓은 하늘이었다. 어쩌자고 저렇게 깊을까- 싶을 만큼. 힘겹게 찾지 않아도 사방이 별로 가득했다. 어쩌면 오늘 달이 절반만 걸린 이유는, 저 달의 절반을 부셔서 하늘에 뿌린 탓일지도 모른다.


“어제 여기서 계속 그림 그렸는데 괜찮더라.”

“이렇게 별 많은 거 처음 봐요.”

“여기가 유독 잘 보이는 것 같아.”


저물어가는 새벽 속에 한껏 익은 밤하늘을 그와 나란히 앉아 본다. 그의 동그란 눈동자 가득 별이 담겼다. 눈 한 번 깜박이자 이번엔 달이 담긴다. 또 한 번의 깜박임이 그것들을 흘려보내고. 이내 화평의 얼굴을 담는다. “어떻게 알았어요?” 턱 아래까지 차오른 소라색 니트. 그 언저리를 눈으로 헤맸다.


“배경 스케치하면서 다니다가 우연찮게 발견했어.”


어제는 작은 스케치용 노트를 들고 무작정 해안가를 걸었다. 달과 별이 환한 곳. 예쁜 풍경을 찾았다고, 같이 가겠냐는 말에 충분한 변명거리가 될 만큼 예쁜 곳. 그런 곳을 찾겠다고.


“웬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진짜 처음 와봐요.”

“그럼 여기 같이 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겠네.”

“그렇죠.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같이 와야겠어요.”

“돌아와야 같이 가는 거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놀란 기색을 감추기 위해 눈을 빠르게 깜박깜박. 그의 소라색 니트와 뾰족한 턱끝과 그 뒤로 보이는 해안 절벽을 시선으로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미안해. 내가 말을…”

“뭐가요. 맞는 말이잖아요. … 돌아와야 같이 오죠.”

“… 미안해.”

“미안하면 또 와서 커피나 팔아주세요.”


그는 퍽 덤덤한 얼굴이었다. 체념인지 뭔지 모를 감정들이 얼굴 위를 스쳐 지난다. 멍청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도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 하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질 않아 한숨과 함께 숨을 삼켰다.


전시회까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갤러리에서도 가벼운 안부 전화와 함께 언제 올라올 건지 일정을 묻기 시작했다. 한 달 됐나. 시끄러운 도시 소음 대신 파도 소리에 파묻혀 산 것이.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와 원두 가는 기계의 진동, 때때로 들리는 고양이의 나른한 울음, 그것에 응하는 그의 웃음소리가 익숙해 진 것이… 벌써 한 달이 됐다.


“나 가면 심심해서 어떡하냐.”

“매상 떨어질 생각 하니까 좀 걱정되긴 하네요.”

“매정하긴.”

“또 올게.”

“네. 또 오세요.”


벌써 이슬이 내릴 시간인가. 그의 얼굴 위로 새벽이슬이 한 꺼풀 맺혔다. 화평은 손끝을 움직여 바닥에다 그의 옆얼굴을 따라 그려보았다. 이마에서 코, 입술로 가던 선이 뚝 멈춘다. 어려운 얼굴이다. 적당히 선을 흘리면 그려질 것 같은데, 쉬이 제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당신을 그렸을까.


펼친 손가락을 웅크려 차게 식은 손안으로 밀어 넣었다. 부서진 달의 파편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밤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도, 화평의 가슴 안에도, 부서진 조각들이 콕콕 박힌다.


-


고양이를 위한 흔들의자가 있던 곳에 이젤이 세워졌다. 겨울바다를 그리고 싶다는 화평에게 창가를 내어준 그는 ‘대신 제목을 카페 이름으로 해주세요.’ 그런 조건 하나를 걸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카페 이름을 단 그림 하나쯤은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참이었으니.


“영업 방해해서 어쩌냐.”

“한가할 때라 괜찮아요.”

“과일청 담가?”

“아뇨. 뱅쇼를 좀 끓일까 해서… 드시고 가세요.”


아까부터 무얼 그렇게 하는지 도마와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보다가 나중엔 아예 카운터 앞에 자리 잡고 서서 빤히 지켜보았다. 커다란 냄비 안에 얇게 썬 자몽과 오렌지, 사과 등이 한가득 쌓여 있다. 코를 킁킁 하자 상큼한 과일향이 끝도 없이 퍼졌다.


“메뉴판에 뱅쇼 없잖아.”

“저 먹으려고요. 감기기운이 좀 있어서요.”


빈 공간은 계피 몇 개로 채우고 흑설탕도 툭툭. 물과 레드와인을 한가득 부으며 “와인 맛이 좀 나는 게 좋죠?” 돌연 화평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뱅쇼는 짧게 끓이면 알코올이 남아 있어 술맛이 나고, 오래 끓이면 알코올이 모두 날아가 달짝지근한 주스가 되는데, 화평은 그래도 술맛이 나는 것을 선호했다. 조금만 끓이라고 할까 고민하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눈치가 빠른 걸까. 아님 본인도 그렇게 마시나…그게 아니라면 역시 ‘그 사람’의 취향이겠지.


“오늘은 일찍 접고 쉬는 게 어때.”

“안 그래도 아까 간판 불 껐어요. 벽난로 좀 죽여줄래요?”

“그럼 춥지 않겠어?”

“가게에서 말고, 위로 올라가서 마셔요. 가게보단 집이 따뜻하거든요.”


그의 곧은 손가락이 카운터 안쪽에 자리한 나무계단을 가리켰다. 2층으로 올라가는 비밀의 계단. 한 달 가까이 이 카페에 오면서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 그가 사는 집.


그의 부탁대로 불씨를 죽이고 제 물감을 정리한 뒤 고양이 물그릇의 물을 갈아주는 동안 이상하게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꼭 연인의 퇴근길을 도와주러 나온 사람 같다… 고 생각해버린 탓일 것이다.


“먼저 올라갈게요.”


달짝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과일향이 확 퍼진다. 그것이 화평의 정신 줄을 꽉 잡아 당겼다. 큰 머그잔 두 개를 든 그가 계단 쪽으로 고개를 까딱. 그리곤 조금 어두운 그늘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제 베이지색 코트를 든 화평이 그 뒤를 따른다. 코트자락을 움켜쥔 손가락이 자꾸만 꾸물꾸물 요동을 쳤다.


쨍한 형광등 대신 은은한 스탠드 몇 개로 불을 밝힌 그의 방은, 생각보다 넓고 또 아늑했다. 조금의 욕심도 느껴지지 않는 소박한 공간. 이 방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곳은 동그란 창문이 바라보고 있는 벽면이었다.


“전부 다 네가 찍은 거야?”

“네.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오늘까지요.”


작은 사진 안엔 모두 같은, 그러나 각기 다른 바닷물이 넘실넘실 파도치고 있다. 물비늘이 쨍한 것부터 안개가 가득 껴 뿌연 것까지. 같은 것 하나 없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화평은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짜디짠 바닷물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오늘 찍은 사진을 파도의 행렬 가장 끄트머리에 쪼르르 부었다. 하얀 테두리끼리 손을 꼭 잡고 서서 그의 바다를 조금 더 넓힌다. “… 예쁘네.” 코앞에서 하나씩 관찰하다가 후엔 두어 걸음 뒤에서 바라봤다. 사진을 찍던 그의 모습이 파도치는 벽면 앞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진다.


“그 사람 보여주려고 찍는 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사진 하나당 한 대씩 때려주려고요.”

“무서워서 돌아오겠냐.”

“식기 전에 먹기나 해요.”


예상은 했으나 역시나. 이 사진마저 ‘그 사람’을 위한 작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모든 생활이 그렇다. 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 카페도, 지금 직업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전부 다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얼마나 깊은 사랑이었기에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쥐어 잡고 흔드는 걸까. 화평은 그 사랑이 궁금했다. 동시에 무섭기도 했다.


“좀 더 끓일 걸 그랬나…”

“괜찮아. 맛있어.”

“많이 드세요. 어차피 혼자 다 못 마셔요.”

“그러다 취하면 나 재워줄거야?”


따끈한 열기 머금은 뱅쇼의 향이 한 모금 마시자마자 온 입안을 지배했다. 달달한 과일향 사이로 알싸한 알코올 맛이 톡톡 터진다. 화평은 혀를 굴려 뜨끈해진 입안을 훑었다. 당분이 남아 입술이 조금 끈적거렸다. 말을 할 때마다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그 감촉이 생경하다.


“바닥도 괜찮으면요.”


온몸으로 내 바운더리엔 가시가 돋아 있다- 고 외치는 주제에 다가가면 그 바운더리도, 가시도, 모두 허상인 사람이었다. 마치 지독한 안개를 한 꺼풀 입은 겨울바다처럼. 그 뿌연 것을 손으로 휘젓고 나면 타인의 침범을 쉽게도 허락하는 바닷물이 있다. 수줍게 밀려들어 발목을 간지럽히는 바닷물이.


보드라운 주홍 불빛이 그의 뺨을 타고 흐른다. 머금는 빛에 따라 참 선이 달라지는 얼굴이다. 쨍한 일출 속에선 날카로운 선을, 달 조각이 쏟아지던 그 밤엔 눈으로 가늠하기 힘들 만큼 흐릿한 선을, 방안의 스탠드 불빛 속에선 꼭 저만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비밀스런 선을. 습관처럼 또 그의 얼굴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단 한 번도 완성해본 적 없는 미완의 스케치만이 머릿속에 남을 뿐이다.


“곧 가시죠?”

“4일 정도 남았나. 많이 섭섭한가봐?”

“… 심심할 것 같아서요.”


잔이 기울고 밤이 기울고. 동그란 달도 고개를 기울여 창가를 기웃거리고. “거의 매일 보던 사람을 이제 못 보는 거니까…” 바다 위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온전히 제 얼굴을 드러내는 밤이다. 그래서 화평은, 자꾸만 기우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꾸욱- 방바닥을 짓누른다.


그의 손 그림자와 화평의 손 그림자가 닿았다. 그리곤 엮인다. 곧이어 섞였다.


달큰한 과일 냄새가 났다. 어깨를 툭 부딪치자 “아…”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내리까는 그다. “계속… 생각 날 것도 같고요.” 한껏 작아진 목소리가 화평의 뺨으로 와 닿는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말이 가까운 거리를 조금 더 좁히게 만들었다. 살짝 거친 살결을 가진 손등의 느낌이 좋다. 손가락을 구부려 세게 잡아보았다.


양껏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뺨에 닿는다. 어지럽게 섞인 한 쌍의 손. 반대쪽 손은 그의 허벅지 옆 바닥을 지그시 누른 채다. 품 안에 그가 온전히 들어차 있다. 이 뻐근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굳이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비틀어 연거푸 뺨에 입을 맞추다, 살며시 입술로 향할 뿐이었다.


“윤… 윤화평씨.”

“… 어.”


제 이름이 이렇게도 낯설었던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 이름 석 자. 그리고 제 어깨를 붙잡는 다급하지만 조심스런 손길. 코앞에서 본 그의 눈가가 온통 붉었다.


“… 안되겠어요. 미안해요. … 진짜 미안해요.”


속상한 말투로 선을 긋는다. 제가 더 상처 받은 얼굴로 고개를 틀어 입술을 피했다. 곧이어 뚝, 뚝, 눈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것이 기우는 밤. 그의 마음도 기울어 그 사람을 비워내길 바랬건만.


“괜찮아.”

“… 미안해요. 아, 미안해요, 내가 아직…”

“괜찮아. 진짜야.”


아무리 기울어도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은 결코 쏟아지지 않는다. 그의 사랑이 그랬다.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그곳에 화평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

.

.


사각 사각 연필을 깎아 하얀 바탕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선이 겹치고 겹쳐 곧 하나의 얼굴이 된다. 부드럽지만 마냥 흐릿하진 않은 얼굴선. 바닷바람이 자주 머물다 가는 머리카락. 오똑하게 솟은 코와 또렷한 입술. 마지막으로 그리움을 수십 번 덧입은 눈동자를 칠하기까지 채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마지막 선을 그었을 때 깨달았다. 생각보다 깊게 사랑하고 있음을. 밖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차오른 애정임을. 그를, 최윤을, 사랑하게 돼 버렸구나.


입술을 꾹 물고 울음을 참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때 닦아주었던 눈물의 감촉 역시 생생하다. 안타까움과 질투로 범벅된 제 손은 얼마나 차가웠던가. 그림 아래에 제 서명과 날짜를 새기며 그의 사랑의 안위와 제 사랑의 안위를 함께 빌었다. 무엇을 선택할진 오로지 신의 몫이었다.


-


여전한 곳이었다. 벽난로 앞에 새 러그가 깔렸다는 것 말곤 이틀 전 모습 그대로였다. 방금까지 손님이 있다 나갔는지, 빈 컵을 들고 테이블을 닦던 그가 출입구로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복잡한 얼굴로 저를 본다.


“가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제 행색이 너무 떠나는 사람의 모양새기도 했다.


“… 커피 한 잔 가져가요.”


그가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릴 동안 맨 처음 그날, 제 언 몸을 녹여주었던 벽난로 앞을 서성였다. “얘 아무리 봐도 돼지야.” 폭신한 방석 위에서 고롱고롱 낮잠에 빠진 고양이의 뱃살을 손으로 조물거려 보았다. 솜방망이 같은 앞발이 손등을 찰싹 내리친다. 한 달이나 봐놓고, 참 매정한 놈이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히 들고 가세요.”

“고마워. … 이거. 커피값.”


내내 손에 들고 있던 돌돌 만 도화지 한 장이 그제야 제 주인을 찾아간다. 커피를 내어주고 종이를 받아가느라 아주 잠깐 스친 손끝이 뜨겁다.


“… 진짜 화가였나봐요.”

“지금까지 거짓말인 줄 알았어?”

“한 절반정도는요. 돈 많은 한량인 줄 알았죠.”

“참나…”


정성들여 수채화 물감으로 색을 입혀도 제 눈으로 본 그의 색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은은한 미소가 번진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 좋아해.”


그를 놀래켜 본다.


“못 받아주는 거 알아. 그냥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그 한 달 동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옆을, 마음을, 온 몸을 다 줘버리는 거. 그게 얼마나 흔치않은 일인지 밤새 그를 그리며 깨달았다. 어쩌면 제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일이라는 것도. 그래서 전하고 싶었다. 가득 찬 그 마음에 제 발 하나 디딜 곳 없겠지만, 그럼에도, 알려주고 싶었다. 이 세상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 고마워요.”

“안 바쁘면 전시회 놀러 와. 내가 밥 살게.”

“시간 보고요.”

“또 올게.”


가만가만 시선이 흐른다. 시간의 흐름보다 더 느리게. 그의 얼굴을 오고가며 상대를 오롯이 눈 안에 담는다.


“… 한 번 안아 봐도 돼?”


욕심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온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조금 다급하게 그의 팔목을 잡아버렸다. 받아주지 못하는 거 안다고 말한 주제에 붙잡은 손은 뜨겁기만 하다.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한 팔이 화평의 등을 감싸 안았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게감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잘 지내요.”


다정한 거절이 어찌나 고마운지.


“너도.”


한겨울의 바다에서 저를 부른 게 그여서, 어찌나 다행인지.



-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시선은 끝임 없이 출입구를 맴돌았다. 혹시나 그가 왔을까봐, 보고 싶은 얼굴을 찾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최윤- 이란 이름을 대는 사람이 오면 꼭 저에게 말해달라고 진행요원에게 부탁까지 해둔 채였다.


“야, 윤화평.”

“형. 왔네. 못 온다고 그럴 땐 언제고.”

“윤선생님 복귀 전시회인데, 제가 당연히 와야죠.”


오라는 그 대신, 꽤나 오랜만에 본 사촌형이 화평에게 손을 흔든다. 퍽 가깝게 지냈던 사이라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같이 전시회장을 걸었다. “다음 주에 검진날이다. 까먹을까봐 알려주러 왔어.” 이래서 외과의사 사촌을 두면 힘들다. 정기 검진 빼먹을까봐 손수 찾아오는 서비스라니.


“잠은 잘 자?”

“잘 자. 약도 잘 먹어. 이 사람이 지금 전시회에 그림을 보러온 거야, 왕진을 온 거야.”

“둘 다, 인마. 갑자기 바다 간다고 잠수타서 걱정했잖아.”

“내가 애냐. 그냥 바다 보면서 그리고 싶었어.”

“뭐 좋은 데라도 찾았나봐?”


우뚝. 화평의 걸음이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춘다. 노을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둔 작은 통나무집 하나. “… 카펜데, 커피도 괜찮고 거기 사장님도… 괜찮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왔어요?’ 카운터 안에서, 벽난로 앞에서 반가운 인사를 건네던 사람. 화평의 두 눈이 그림 속 통나무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보고 싶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얼마나 더 멀어져야 마음에서 떠날 건지. 새삼 아주 긴 기다림을 선택한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라면 단 하루도 못 견디고 다 버렸을 것 같은데…


“아. 혹시 알려나. 그 카페 사장님, 서울에서 의사했대. 외과의사. 형도 외과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세상에 외과의가 몇 명인 줄 아냐.”

“그… 이름이 최윤 이라고, 작년까지 큰 병원에 있었다는데. 키 크고, 아니다. 그냥 다음에 나 갈 때 같이 가자.”


아주 얄팍한 수였다. 혹시 형이 그를 알고 있다면, 그래서 그와 제가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생긴다면 조금은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 오랜 기다림에 지친 그를 제가 붙잡아 볼 수 있지 않을까.


“… 너 최윤 만났어?”


꽉. 형의 손이 화평의 어깨를 억세게 잡아챘다. 손끝이 마구 떨린다. 복잡한 시선이다. 그걸 마주 보고 있는 제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로.


-


너 깨어나고 얼마 뒤에 전화가 왔어. … 최윤 걔가, 화평씨가 저보고 누구냐고 그래요. 선배. 저보고 누군데 집 비밀번호를 아냐고… 그래서, 선배 심부름으로 약 가져다주러 왔다고 둘러댔어요. 어떡해요. 선배… 그러면서 울더라. … 네 병명 알지. 해리성 국소적 기억상실. 특정 기간이랑 사건에 대해 전혀 기억 못하는 거. 네가 잊어버린 특정 기간에, 윤이 걔가 있었던 거야.


네가 왜 잊었는지 나야 모르지. 네 수술은 내가 맡았고 이모는 윤이가 맡았는데… 윤이, 걔 잘못 아냐. 애초에 트럭이 조수석을 먼저 박았으니까 충격이 훨씬 심했지. 나이가 있기도 했고. … 글쎄다. 너한테 이모 죽음이 너무 충격이라 관련된 일을 죄다 잊은 게 아닐까.


요즘 시대가 아무리 열렸다고 해도 남자끼리 사귀고 그런 거, 남들이 알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너희 사이 나만 알고 있었어. 너네 친구하라고 소개해준 사람이 나였거든. … 이것도 기억 안나지? 안 나는 게 당연해.


… 아니, 야. 화평아. 일단 앉아. 진정하고… 생각해봐. 네 애인이 죽은 듯 누워 있다가 깨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는데 애인이 나보고 누구냐고 그러네. 근데, 내가 네 애인이라고 말을 못해. 같은 남자라. 그때 윤이 마음이 어땠겠냐.


그니까 모른 척 하고 살아. 너 잊겠다고 떠난 앤데, 네가 그 정도 배려는 해줘야지. … 걔가 너랑 보낸 그 한 달을 제정신으로 버텼겠냐. 안 그래도 힘든 애 더 힘들게 하지마라. 걔 선배로서 부탁할게.


잊자. 딱 한 달이잖아. 한 달. 그거 금방 잊혀져.


-


때때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차를 세우고 문밖으로 뛰쳐나와 먹은 것도 없는 속을 전부 게워내기도 했다. 누런 위액을 토할 때까지 구역질은 멈추질 않았다. 스스로에 대환 원망과 환멸, 분노가 속을 드글드글 끓게 만든다. 심장이 부서질 듯 빠르게 뛰었다.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유리창에 어린다. 저를 앞에 두고 저에 대해 설명해야 했을 그 속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밍밍한 코코아. 건더기 없는 유자차.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 알코올이 남게 끓인 뱅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멍청할 수가 있을까.


기다린다고 했어. 그 바다에서, 그 사람을,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형의 말은 틀렸다. 그는, 최윤은 저를 기다린다고 했다. 언젠가 돌아올 사람이니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운전대를 억세게 잡고 악셀을 세게 밟았다. 검은 장막이 드리운 도로를 빠른 속도로 찢는다.


걔가 기다리는 사람이 지금의 너일 것 같아?

최윤이 사랑한 사람은 지금의 네가 아냐. 그때의 너야.

너, 걔랑 만난 기억 있어? 없잖아.


이명처럼 형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때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최윤의 관한 기억은 한 달 전 그 바다 앞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의 기억은 애를 써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차를 친 화물차 기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그 당시 사랑한 최윤의 얼굴이 생각나질 않는다.


새벽 5시 20분. 그가 아직도 저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 화평의 조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

.

.


주차구역에 아무렇게나 차를 팽개친 채 모래사장 위를 뛰었다. 발이 모래 속으로 푹푹 꺼지다가 어느새 단단한 지반을 밟게 된다. 그때쯤이면, 보이는 것이다. 다섯 개의 나무계단을 가진 작은 통나무집.


“… 최윤.”


두툼한 코트 속에 몸을 숨긴 그가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손엔 여전히 즉석 사진기를 든 채였다. 오늘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람’을 위한, 그러니까 저를 위한, 바다의 한 순간을 기록한다.


부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한껏 헤집었다. 슬핏 눈을 감은 그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예쁜 얼굴.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제가 사랑해 마지않았을 그 얼굴.


“최윤!”


하고 싶은, 해야 하는 말 대신 그의 이름만 크게 불렀다. 조금 느리게 돌아선 고개. 마주친 두 눈. 무작정 뛰어 놀란 그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 다녀왔어.”


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은 아니지만 또다시 너를 사랑하게 된, 내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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