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만 있다가 나와. 같이 집을 나서도 되는 걸 윤화평은 꼭 먼저 집을 나섰다. 같이 갈게요. 그 말에도 화평은 윤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추워. 이따 나와. 미리 차에 히터를 틀어둘 셈인 거였다. 읍내에 나갈 때면 꼭 이장님 댁 트럭을 탔다. 하얀 트럭. 제법 오래 타서 군데군데 칠은 벗겨졌고 누렇게 뜨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장철이며, 한창 농번기 때 짐을 옮기는데 이 동네 일등 공신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종종 차가 없는 파란 지붕 박수무당이, 멀리서 온 신부님을 데리고 장을 볼 때도 제값을 톡톡히 해냈다. 윤은 먼저 나가려는 화평의 손에 제 몫의 털장갑을 끼워줬다. 괜찮대도. 말은 그렇게 해도 화평은 장갑을 꼭 낀 채 집을 나섰다.
TV 위에 올려진, 손바닥만 한 시계를 보며 방바닥에 앉아있던 윤은 이대로 바닥에 눕고 싶은 생각을 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색이 바랜 플라스틱 탁상시계는 째깍거리는 소리도 컸다. 처음 화평의 집에서 자던 날엔 아무래도 신경 쓰여 윤이 도중 일어나 건전지를 빼기도 했다. 덕분에 시간도 모르고 정오 때까지 화평과 잠을 잤다. 윤은 상용시로 돌아갈 이른 버스를 놓쳤고, 화평은 신당에 불을 올리기 바빴다. 외풍이 심한 집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다 일어나 못내 서로 퉁퉁 부은 얼굴이 웃겨 밥을 먹는건지 웃는건지 누룽지를 떠먹으며 실없이 웃었다.
뜨끈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저절로 몸이 녹아내렸다. 잠깐만 누울까. 고작 한 칸 옆으로 움직인 분침을 보다가 윤은 스르륵 몸을 내렸다. 기울기 시작한 몸이 누워지는 건 금세라 윤은 팔을 포갠 채로 몸을 바짝 웅크려 모로 누웠다. 어제도 초저녁부터 눈을 붙여서 꽤 오래 잤는데도 또 잠이 왔다. 눈꺼풀이 무거워 까무룩 잠들었다가 클랙슨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신부님! 화평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따라붙었다. 황급히 방을 나서느라 채 숙이지 못한 머리를 나무틀에, 엄지발가락은 또 문틀에 부딪혀아픈데도 윤은 헐레벌떡 서둘러 나갔다. 어젯밤 기상예보 말대로 한파라더니 나온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코를 훌쩍이게 됐다.
"천천히 와. 뛰지 말고."
미끄러워. 조수석 창문을 반쯤 내린 화평이 몸을 숙여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오는 윤을 향해 외쳤다. 간밤에 내린 눈에 시멘트 바닥 위를 희끗하게 채웠다. 아무리 야트막한 언덕이라 해도 추운 날씨 탓에 흩뿌리듯 내린 눈이 살얼음이 되었다. 화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이 삐끗했지만, 트럭 문을 잡아 넘어지는 걸 모면했다. 조심하라니까. 화평이 손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안 다쳤어요. 놀란 마음을 추스리며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윤은 착실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까무룩 잠든 게 민망해서 화평과 도통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는데 눈가와 뺨에 남은 눌린 자국을 화평이 장갑 낀 손으로 만졌다. 잤어? 화평의 물음에 민망해져 윤은 어물거리며 코를 삼켰다. 대답을 구태여 듣지 않으며 화평을 핸들은 단단히 쥐어 잡았다.
"신부님, 침 흘렀다."
화들짝 놀라 윤은 외투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허옇게 말라붙었을까 싶어 급히 손톱을 세우는데 화평이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농담, 농담. 화평이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최윤의 손에 들려줬다. 화평에게 장갑을 내줘 맨손인 최윤의 손을 같이 잡았다. 가자마자 장갑부터 사자. 당부하듯 털장갑이 윤의 손등을 매만지다 떨어졌다. 핸들을 잡은 화평의 양손을 눈으로 훑으며 윤은 제 핫팩만 쪼물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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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이 듬뿍 들어간 설탕 입힌 도너츠는 윤이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뻥튀기를 파는 할아버지 옆은 항상 작은 간이트럭에서 도너츠를 파는 중년 부부의 자리였다. 제법 여러 번 장에 따라나섰기 때문에 이젠 얼굴을 보며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해졌다. 제일 먼저 윤의 손에 팥도너츠를 하나 들려준 화평은 넉넉하게 산 도너츠 봉지를 마저 받아들었다. 서비스로 꽈배기도 하나 더 넣었어. 아주머니의 말에 화평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이렇게 매번 덤 주면 장사해서 뭐 남아요, 담엔 안 주셔도 돼요. 말은 그렇게 해도 헤벌쭉 웃으며 윤 대신 감사 인사를 했다. 식지도 않은 걸 급히 한입 물어 삼킨 탓에 입을 벌린 채 뜨거운 김을 내뱉던 윤은 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꾸벅 화평을 따라 숙였다.
"맛있어? 좀 식히고 먹지. 뜨거운데."
윤의 입가에 묻은 설탕 부스러기를 털어주며 화평은 연신 웃기 바빴다. 여기 더 있어. 먹고 더 먹어. 입이 짧아 순대국밥도 겨우 반을 비우면서 윤은 단팥도너츠 2개쯤은 쉽게 먹고는 했다. 꽈배기는 화평 씨 먹어요. 끝까지 팥도너츠 먹으란 소리는 안 했다. 우스워서 화평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아직 따끈한 꽈배기를 꺼내물었다. 꽈배기를 붙들지 않은 남은 세 손가락이 칼바람에 금세 얼얼해졌다.
“남은 건 신부님 다 드세요.”
손목에 도너츠 봉지를 들려주자 윤은 식을세라 외투 안에 검은 봉지를 넣고 끌어안았다. 점심 뭐 먹을까. 후후 불어가며 단팥도너츠를 무는 윤과 눈이 마주친 화평이 왼눈으로만 환히 웃었다. 아니다, 점심은 일보고 천천히 먹자.
"내년에 할머니가 텃밭 좀 나눠주신대서. 옆에 방울토마토도 심고, 옥수수도 심을까 봐."
신문지에 둘둘 싸매서 갖고 나온 녹이 슨 호미를 철공소에 맡겼다. 생각보다 젊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작년에 아버지한테 물려받았대. 화평이 슬쩍 귀띔을 해줬다. 쉬지 않고 열에 달궈진 철을 두드리는 벌건 얼굴에서는 한파를 무시하듯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게다가 반팔. 윤은 제 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하나는 내 꺼고, 하나는 호박집 할머니꺼. 이제 무릎이 영 안좋아지셔서 거동을 못 하신대서 내가 대신 들고나왔지, 뭐. 화평은 저보다 어린 사장에게 허리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불 좀 쫴도 되죠?"
넉살좋게 말한 화평은 윤의 한 팔을 끌어당겼다. 은은하게 남은 불길 앞에 윤은 새 장갑을 낀 손바닥을 펼쳤다. 화평이 장에 도착하자마자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사준 털장갑이었다. 동네 어르신들께 복채로 받은 거라 그런지 쌈짓돈인 게 한 눈에 봐도 티가 났다. 고구마 구워 먹으면 딱이겠다, 그치? 화평의 말에 윤은 빙긋 따라 웃었다. 조금 전까지 도너츠를 두 개나 먹었는데 화평의 말에 입에 침이 고였다. 열심히 쇠붙이를 망치로 내려치던 젊은 사장이 무뚝뚝하게 불 앞으로 다가와 힘있게 풀무질했다. 신기하게도 바람 몇 번에 다 죽어가던 불길이 솟아올랐다. 눈앞이 활활 타올랐다.
무뚝뚝하다 여겼는데 고맙다는 화평과 윤의 인사에 쑥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넙데데한 볼살이 씰룩였다. 낯을 가리는 것인지 목장갑으로 코를 쓱 문지른 젊은 사장은 다시 손보던 농기구들 앞으로 다가갔다. 줄지어 놓인 녹슨 연장들이 때 빼고 광낼 준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껀 점심 먹고 천천히 와서 찾아야겠다. 화평이 눈대중으로 순서를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신부님이랑 나랑 반반 나누자."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왜 못 먹어. 미리 씻어놓고 아침 미사 갈 때 먹고, 다녀와서 저녁에 또 먹어."
올해 동네 감나무가 모두 풍년이었다며 단감에, 홍시에, 곶감에 질리게 먹어 이제 감은 신물이 난다는 화평은 과일가게에 들렸다. 단내가 폴폴 나는 딸기도 한 상자, 작은 귤이 든 상자도 하나 샀다.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가게 아주머니께 받은 화평은 그 자리에 앉아 귤을 나눠 담기 시작했다. 귤 상자 빈 곳에는 딱 알맞게 딸기 한 팩이 들어갔다. 신부님 이대로 들고 가면 딱 되겠다. 노끈까지 가게 주인에게 받아서는 손잡이를 만든 화평이 한 손에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버스터미널까지는 들어다 줄게.
"나랑 나눠 먹어. 나 혼자 이거 다 못 먹어."
"알겠어요."
화평과 입씨름을 해봤자 이기질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 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에도 지갑을 여는 것은 화평이었다. 사제가 돈이 어딨다고. 윤이 주머니를 뒤적이기만 해도 화평은 아서라며 윤의 손목을 붙들었다. 나도 어차피 신당에 과일 올려야 헤. 시장통을 한 바퀴 돌고 나자 화평과 윤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가득 들려있었다. 이거 차에 놓고 밥 먹으러 가자. 화평이 시장 골목, 골목을 지나다닐 때마다 시장통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그 용하다는 젊은 총각이네. 공짜로 얻은 커피믹스를 나눠 마시며 걷다 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털이 들어간 겨울용 방한 신발이며, 하얀 실내화, 고무 슬리퍼 그리고 운동화가 즐비한 신발가게 앞.
"뭐해, 안 따라오고."
무거운 짐을 놓을 생각에 바삐 움직여 앞을 저만치 먼저 앞서가던 화평이 도로 길을 돌아와 신발가게 앞에 섰다. 신발 필요해? 그 좋아하는 간식도 먹는 걸 잊은 채 물끄러미 좌판을 꽉 채운 신발을 보던 최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아랫입술을 윗니로 살짝 물며 윤은 어색하게 굳은 뺨을 풀려 애썼다. 혀 끝에서 설탕 덩어리가 녹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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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따라 죽을 거야?"
네가 자꾸 잊어버리나 본데. 나, 약속했어. 윤화평이랑. 그러니까…. 말을 다 마치지 못한 강 형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간다. 툭 하니 내려놓은 종이봉투. 매번 같은 죽집이었다. 형사님도 많이 마르셨네요. 말 그대로 반쪽이 된 얼굴은 칙칙하고, 살이 빠져 유독 더 옴폭 눈 주위가 거무죽죽했다. 바싹 마른 입술 위로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윤은 고개를 떨구며 어깨를 숙였다. 눈물이 둘 다 많아졌다. 문을 향해 돌아섰던 강 형사가 거칠게 눈가를 닦아내더니 돌아서서 윤의 가슴팍에 세게 뭔가를 들이밀었다. 그 탓에 윤은 뒤로 두세 걸음 밀려났다.
"야. 이거…."
고 선배랑 나랑 알아서 처리했어.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도 돼. 그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강 형사는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며 손을 움직였다. 흐트러져 내린 머리카락은 너저분해져서 강 형사는 귀 뒤로 황급히 머리카락을 넘긴다. 눈가가 빨갰다. 나 간다. 말을 마친 강 형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문을 열자마자 흘러들어온 바람 소리에 대부분 놓쳤지만. 그거라도 쥐고 버텨. 윤의 귀에는 적어도 그렇게 들렸다.
종이봉투. 언뜻 살펴본 안에 익숙한 운동화가 보였다. 혹시 돌려받을 순 없는건지 경찰서며, 강 형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갔다. 겨울 찬 공기가 외풍에 밀려드는 복도에 서서 마셨던 율무차. 텁텁해진 입안을 달짝이며 윤은 몇 번이고 같은 걸 물었다. 아직 안 되나요? 한숨과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는 손바닥에 매번 알면서도 기대감으로 쌓아 올렸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교구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을 닦아내기 바빴다.
외투도 다 여미지 않은 채 버스도 타지 않고 꼬박 몇 정거장을 걸었다. 찬바람이 서늘하게 몸을 감쌌다. 건조하고 차기만 한 바람에 뺨이 트고, 손등이 발갛게 일어나 밤새 쓰라렸다. 꼬박 3개월이었지만 길고 긴 3년 같은 나날들이었다. 돌려받은 화평의 물건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윤은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해요. 안 그래도 부피도 적은 운동화를 있는 대로 끌어안으니 종이봉투가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꼭 네가 죽을 것 같아서 내가 겁이 나니까. 담담하게 말하려는 대도 강 형사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다음에 꼭 같이 밥 먹어요, 강 형사님."
눈물이며, 콧물이 흘러 엉망인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며 윤은 옹송그린 자세 그대로 강 형사를 배웅했다. 운동화 한 짝. 바닷물이 마른 탓에 방파제에서 건네 받았던 그 날과 같은 투명 지퍼백 안에 허연 가루가 만연했다. 짠 냄새가 났다. 덜 마른 세탁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에도 윤은 소중하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튿날, 윤은 신발을 집 근처 세탁소에 맡겼다. 한 짝만요? 직원이 이리저리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든 운동화를 살폈다. 신발 밑창도 많이 닳아있었다. 바닷물에 찌들어 굳은 신발 끈은 많이 헐어있었다. 세탁을 마치고 오면 온전할지 걱정될 정도였다. 한 짝밖에 없어서요. 윤이 답하자 직원이 말했다. 그럼, 버리지. 신으시려고요? 점원의 말에 윤은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냥 가지고 있으려고요. 좀처럼 진전없는 대화에 점원은 작은 영수증과 함께 찾을 때가 되면 문자로 연락을 드리겠단 말을 남겼다.
교중미사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 윤은 세탁을 마친 운동화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장 위에 한 번, 여벌 구두 한 벌이 놓인 신발장 안에 한 번 넣었다가 결국 거실까지 갖고 들어갔다. 신발 끈도 풀어서 예쁘게 다시 묶어봤다가 도통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결국, 십자가며 마리아상이 놓인 책상 한 쪽에 놓았다. 잠은 여전히 잠들기 어려웠지만, 눈을 뜨면 언제나 시선이 닿는 곳에 윤화평의 신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잔뜩 옥죄였던 숨통이 그때에만 풀리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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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일장엔 순대국밥 대신 콩나물해장국을 먹기로 했다. 이런 날엔 칼칼한 게 좋다며 화평은 김치 콩나물해장국을 두 그릇 시켰다. 펄펄 끓는 돌솥에 나온 콩나물해장국에 화평은 간이테이블 위에 놓인 달걀을 얼른 까 넣었다. 도통 둘 사이에는 말이 오가질 않았다. 육광의 시신과 함께 발견됐었던 화평의 운동화 얘기 뒤로 둘 사이엔 되직한 침묵만이 있었다. 같이 나온 밑반찬 그릇을 윤의 앞으로 가까이 놔주며 화평이 큰기침을 했다.
"뭐 좋은 거라고 갖고 있어. 쓸데없이."
그 신발 보면서 울기밖에 더 했겠어? 판판한 플라스틱 상 위에 양 팔을 포개 올린 화평은 여전히 기세 좋게 끓는 해장국 끄트머리만 노려봤다.
"…텼어요."
"뭐?"
"그걸로 여태 버텼어요."
화평의 시선이 한참 제게 머무르는 걸 알았지만 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며 김이 나는 국물을 뜨기 바빴다. 그냥 먹다가는 입안을 홀랑 데기 딱 좋아서 앞접시에 덜어 담아서 윤은 꾸역꾸역 해장국 국물을 마셨다. 외투 지퍼를 다 내리고 앉은 화평의 가슴팍 위로 보이는 묵주가 눈에 들어와 윤은 눈을 꾹 감았다. 속이 더부룩한데도 쉬지않고 집어먹었던 도너츠로 느글거렸던 속이 이제야 달래지는 듯싶었다.
"그러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윤이 밥 한술을 떠올리자 화평이 얼른 뻘건 오징어 젓갈을 집어 그 위에 얹어주었다. 윤화평 씨도 드세요. 콩나물 줄기를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윤은 네모난 깍두기를 집어 화평의 숟갈 위에 올렸다. 알았어, 먹으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도 돌솥이 식지 않아 둘 다 허연 김을 연신 입으로 내뿜으며 밥을 먹었다. 속을 든든히 채우고 비닐 천막을 걷고 나왔을 때 온통 주위가 하얬다.
"눈 온다. 신부님."
솜을 뜯어놓은 것처럼 포실포실한 눈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걱정하자 화평이 손을 저었다. 이건 안 쌓여, 녹을 거야. 화평의 말대로 눈은 쌓이질 못하고 금세 녹았다. 그대로 트럭을 몰아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다행히 늦지않아 상용시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꼭 택시 타고 가."
구태여 외투 주머니에 찔러주던 만 원짜리 두 장. 한 장이면 돼요. 그 말에도 화평은 윤이 돈을 다시 못 빼게 막고는 버스에 등을 밀어 태웠다. 핫팩을 넣어둔 주머니가 뜨끈뜨끈했다. 화평이 준 돈으로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집 대문 바로 앞까지 온 윤은 힘들이지 않고 화평이 챙겨준 것들을 옮겼다. 맨손으로 들었으면 차기만 한 손가락에 엉긴 줄이 아플 법도 한데 털장갑 덕분인지 미끄러질 일도, 손이 아릴 일도 없었다. 매번 바리바리 챙겨주는 밑반찬들. 집에 오자마자 화평이 싸준 반찬과 과일을 냉장고 안에 정리했다.
그냥 우리 이렇게 살자. 너랑 나랑 이렇게.
가끔 와도 되고, 자주 와도 되고. 그래도 꼭 전화는 하고 와.
혼자 살기엔 좀 크고, 둘이 살기엔 비좁긴 한데 너랑은 괜찮을 것 같다.
버스터미널로 가는 트럭 안에서 화평이 뜬금없이 말했다. 윤은 하마터면 눈시울이 붉어진 윤화평 따라 울 뻔한 걸 꾹꾹 눌러 참았다. 나중에 가서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윤화평 씨. 윤은 일부러 더 담담하게 말했다. 얼마나 매만졌는지 반질반질 칠이 벗겨진 장미묵주에 고작 축성 한 번 했을 뿐. 잃어버릴세라 다시금 목에 거는 흰 눈의 무당이나, 짝도 없어 신을 수도 없는 걸, 발에 맞지도 않아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한 걸 여태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 신부나. 둘이 미련한 건 똑 닮아있었다. 사무치는 속을 달랠 게 그것뿐이어서. 그래도 다시 만났구나. 우린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이제껏 살고 버티고 있었구나.
윤은 차갑기만 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못 이기게 추웠다. 장판이 절절 끓는 화평의 집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외출로 돌려놨던 보일러를 실내로 돌리며 윤은 카펫 위로 발을 옮겼다. 온기가 돌려면 아직도 한참은 외투를 벗지 못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열기를 잃지 않은 핫팩을 움켜쥐며 윤은 코를 훌쩍였다.
아, 전화. 화평이 도착하면 꼭 전화하라고 했다. 윤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들었다. 나 기기 변경할 때 됐어. 내꺼 가져가 그럼. 요새 누가 이런 구닥다리 폰을. 통신비 내가 내줄게. 나 요새 굿판 많아. 내가 벌어도 신부님 보다는 많이 벌지. 충전기를 찾기도 쉽지 않고, 특히나 화평의 집에만 오면 전화가 불통이었다. 교구에서 오는 전화는 꼭 화평의 집에 연결된 유선전화로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왜 전화를 걸어놓고 말을 안 해. 여보세요. 잘못 걸렸나. 신부님 맞아? 거 봐, 내가 공기계 있다니까 말 안 듣고. 여보세요. 이 번호 마태오 신부님 번혼데요. 누구세요. 여보세요, 마태오. 신부님? 아니, 혹시 전화기 주우셨어요? 투박하게 쏘아붙이다가 걱정이 되는지 삽시간 굴곡진 화평의 목소리에 윤은 한 번 숨을 삼키며 먹먹해진 목을 풀었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웃음과 동시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윤은 마른 입을 열었다.
"최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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