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얗게 수놓아진 설원 위로 찍힌 외톨이 같은 발자국과 내 청각을 모두 잠식시킨 백색소음들 사이에서 익숙한 종이냄새에 마음 한구석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묘한 감정에 흔들리던 그 날.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던 그 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그 날은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을 집어 삼킬 것만 같이 펑펑 내리는 눈발에 모든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무언가 홀리듯이 그 하얀 눈밭을 걷다보니 어느새 내 발자국만 가득 눈밭을 채웠다.
“하아….”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새가 꼭 지금 꼬여버린 내 마음 같아서 더 복잡해지기만 한다. 주머니에 꼭 껴놓은 얼어붙은 손을 꺼내 입김으로 녹이며 걸음을 서둘렀다. 무엇에 홀려 이 추운 날 익숙하지만 낯선 이 길을 걷게 됐을까. 그렇게 시작된 걸음이 멈춘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흘러서 많이 변화된 낯선 건물들 틈에서 굳건히 제 모습을 지키고 드러내는 익숙한 간판이 새삼 반가웠다. 이 서점 여전히 여기 있었구나. 주변이 재개발하면서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모락모락 가슴 안쪽 어디선가부터 피어나는 그리움에 망설임 없이 걸음이 서점 안으로 향해졌다.
아. 익숙한 이 냄새, 종이냄새. 사락사락 책 넘기는 소리. 모든 게 반가운 풍경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다시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 익숙한 풍경과 분위기에 홀려 서점 안을 걷기 시작했다. 책장에 걸려있는 꽤 낡은 책들을 손으로 훑으며 이 곳에서의 추억을 되새겨봤다.
그래서일까. 창 틈새로 미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마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환영. 추억이 가득한 그리운 공간에 들어서서일까. 그리운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아주 잠시 그 빛에 찌푸려진 눈살에 그 환영이 진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최윤…?”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내 부름에 나에게로 닿는 그 동공이 커다래졌다. 맞다. 저 토끼 같은 눈망울. 나만큼이나 놀란 너의 정처 없이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 근거 없는 용기가 솟았다.
“오랜만이다.”
“윤화평씨….”
나를 부르는 그 익숙하지만 이제는 낯선 목소리의 떨림이 내게 그대로 전해져왔다. 멎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아주 잠시간의 눈 맞춤이 이어지다 너는 아랫입술을 꾹꾹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할 수 없을 때. 용기가 나지 않을 때. 네가 하던 귀여운 행동. 여전하구나.
“하고 싶은 말 있구나.”
“…우리 어디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할까요?”
어? 꽤 용기를 낸 한방이었다. 예상치 못한 너의 물음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너의 안색이 나빠진다. 거절 당할까봐 주눅 든 모습에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싫어.”
“아, 역시 그렇죠….”
“커피 말고 술이나 한 잔 하자.”
“…네? 당신도 참 여전하네요. 그러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네가 반가웠던 그 날. 너와 내가 만난 그 날. 온 세상이 하얗던 그 날. 우리는 살면서 다시는 없을 기회를 마주하게 되었다.
짤랑. 술잔 안을 가득채운 투명한 소주에 대한 반가움보다 우리 둘이 자주 가던 단골 주점에 오랜만에 다시 왔다는 반가움이 먼저였다. 입 안에 쓰디 쓴 술을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용기를 낸 것 치고는 한마디도 없는 너를 가만히 올려보았다.
“나 안 보고 싶었냐?”
“참 여전하네요, 윤화평씨의 뻔뻔함은.”
“그거야말로 내가 가진 매력이잖아. 그 뻔뻔함을 너도 좋아했었고.”
내 말에 찡그려지는 너의 눈썹. 그리고 조금 살벌하게 나를 노려본다. 저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면 나 답 없는 걸까. 헤어진 이후로 2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여전히 네가 귀여워 보인다면 내가 미친 걸까.
“커피 한 잔 하자며. 할 말 있던 거 아니었어?”
“그냥 묻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에요.”
“뭔데.”
“우리가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 그게 궁금해서요.”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었는데.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 다음에 나올 말은 분명 저거였을 거다. 나도 단언할 수 있으니까. 그때의 우린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사랑했고, 그 불꽃같은 사랑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지 않는 태양. 꺼지지 않는 불꽃.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때는 그 생각이 오만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 할 만큼 너에게 미쳐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것에 비해 우리는 굉장히 흔하고 흔한 연인들처럼 흔하고 초라한 이별을 맞이했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오해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엔 그 믿음에 금이 가고 물이 새고, 결국엔 조각조각 나서 전부 흩어져버리는 그런 이별.
“글쎄. 나도 궁금하네. 실타래 풀듯이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
“너부터 말해봐. 섭섭했던 거. 그때 괴로웠던 거.”
내 말에 너는 말없이 술잔만 응시했다.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그 술을 단박에 입에 털어 넣었다. 너의 그런 모습에 나도 궁금해졌다. 넌 나에게서 어떤 섭섭함을 느꼈을까.
“그때 기억나요? 윤화평씨가 반지 잃어버렸던 날.”
“…아.”
“정말 소중했잖아요. 우리 반지.”
기억하지. 어떻게 그 날을 잊어. 너랑 나랑 정말 감정 제대로 상하면서 싸웠던 날이잖아. 내 대답에 조소를 띄우는 너의 모습이 자꾸 내 시선을 빼앗는다. 그 날도 넌 이런 조소를 띄웠었지.
‘당신은 어떻게 그 반지를 그렇게 쉽게 뺄 수가 있어요! 혹시 다른 사람 생긴 거예요?’
‘잃어버린 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오해라고 했잖아. 할아버지가 왔었어. 뻔히 나랑 같이 사는 거 아시는데. 네 손이랑 내 손에서 똑같은 반지 발견하면 할아버지 마음이 어떠시겠어.’
너의 그 물음에 화가 났었다. 내가 너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날 리가 없는데. 왜 그런 말로 나를 시험할 수 있을까. 내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다 해야 할까.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당연히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너에게서 저런 말을 들었다는 배신감 때문일까.
‘…윤화평씨. 적어도 나한테 상의는 했어야죠. 내가 설마 안 된다고 말했겠어요?’
‘어차피 너도 된다고 했을 거였으면서 대체 뭐가 문젠데?’
‘당신이 나한테 말을 한 거랑 안 한 거의 차이를 말하는 거예요, 난.’
‘최윤 너 진짜! 대체 왜 이렇게 못났냐.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어차피 자신도 그렇게 하라고 했을 거라고 해놓고도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너를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었다.
‘…당신 손에서 사라져있는 반지를 본 내 심정은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너는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어. 근데 그게 내 착각이었나 보다! 그래. 미안하다.’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뻔뻔한 이기심. 지금의 내가 알 수 있는 이 상황을 왜 그때의 난 몰랐을까.
‘윤화평씨 지금 당신의 모습이 이기적이라고는 생각 안 들어요?’
‘그만 좀 하자. 쫌. 미안하다고 했잖아. 뭐가 문젠데? 더 말해봤자 싸움밖에 안 나니까 그만 하자, 대화.’
그때 왜 난 대화를 포기했을까. 왜 나만 생각했을까.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섭섭하다고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 대답에 조소를 띄우며 눈물을 흘린 네가 아직도 생생한데. 그때의 난 그 모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 포기했던 대화가 결국 불행의 씨앗이 될 줄도 모르고. 그저 귀찮은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거다.
“그러게. 너한테 말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난.”
“그게 항상 어려웠었던 것 같아요. 윤화평씨는.”
“또 있었나보네. 그랬던 적.”
“나도 있었어요. 그랬던 적.”
너의 말에 순간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 엄청 화를 내는 내 앞에서도 입만 꾹꾹 다물었던 너. 아. 그때구나.
‘너 무슨 생각이야. 그 선배랑 왜 만난 건데.’
‘그런 거 아니에요. 오해 말아요. 나는 윤화평씨 아닌 다른 누구도 진심으로 만나지 않아요.’
‘그럼 그 선배 만난 이유를 말해.’
‘말 못해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못한다는 너의 말에 황당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답답한 마음에 너를 타박했던 그 날.
‘뭐? 왜 말을 못 하는데.’
‘말하기 싫어요. 말하면 당신이 나한테 질려 버릴지도 몰라요.’
‘그럴 리 없잖아. 그러니까 그 선배 만난 이유나 말해.’
‘윤화평씨. 설마 내가 당신 아닌 다른 사람하고 바람을 피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대답은 회피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는 게 답답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당연히 내가 너를 그렇게 생각할 리 없는데. 대체 너는 왜 그런 생각을 한 건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왜 자꾸 대답을 피하냐고.’
‘말했잖아요. 말해버리면 나한테 질릴 지도 모른다고.’
‘네가 이렇게 말할수록 내가 너의 그 설마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윤화평씨. 대체 왜 나를 못 믿는 거예요? 그냥 믿고 모른 척 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미치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날 얼마나 못 믿었으면 선뜻 말을 못 하는 걸까. 대체 얘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그러는 넌? 넌 대체 왜 지레 겁부터 먹고 숨는 건데? 너야말로 날 믿기는 하는 거냐?’
‘….’
‘최윤. 너 진짜 날 사랑하긴 하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너한테 저렇게 참담한 말을 할 수 있겠어. 욱하는 성질을 못 버리면 결국 언젠가 호되게 치룰 거라는 육광이형 말이 자꾸 생각난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지 계속 술만 홀짝이는 게 지금에 와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그때 그 상황을 뒤늦게나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결국은 그 선배는 왜 만났었어?”
“…그 선배가 윤화평씨 좋아했어요. 내가 그거 알고 가드하려고 가로챈 거예요. 당신 근처로 못 가게 하려고.”
“뭐?”
“추하죠? 말했잖아요. 말하면 질릴 거라고. 내가 소름 끼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덤덤하게 그 상황을 말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사실대로 말했다 해도 변한 것은 없었을 거다. 내가 최윤 아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오해 받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결국 이해해 줄 거라는 그 생각이 우리의 믿음에 균열을 준 것이다.
하지만 최윤만 탓하기에는 내 전적도 너무 화려하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던 적 있잖아. 이해해줄 거라 믿으며 너한테 이기적으로 굴었던 적.”
내 말에 기억하고 있었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너. 날 질책하지 않는 저 덤덤한 눈빛이 더 시리고 아프다. 그때의 넌 애절하고 아주 절박하게 내게 매달렸는데. 정작 지금은 그 누구보다 나를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그저 ‘무無’의 감정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때의 네가 날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너를 보면 내가 널 힘들게 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섰다.
‘왜 연락 한 통 없었어요? 왜 이제야 온 거예요?’
‘사정이 있었어. 미안해. 많이 아팠어?’
‘네. 너무 아팠는데, 너무 아파서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런 내 옆에 당신이 없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많이 섭섭해요.’
‘미안해. 근데 어떻게 하냐. 내 다음 알바였던 애가 어머니가 아파서 쓰러지셨다는데.’
아픈 너를 두고 그저 내 상황이 더 급했었던 그때의 나.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 너의 존재가 귀찮아진 것도 그때쯤일 거다. 이해를 못하는 네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떻게 내 상황과 처지는 봐주지 않고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지? 너의 이기심에 넌더리를 냈었다.
‘그럼 전화 한통쯤은 해줄 수 있잖아요.’
‘너는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지.’
‘왜 항상 그럴 때만 그런 믿음을 갖는 거예요.’
‘뭐?’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넌더리 날 정도로 이기적인 건 언제나 나였었다. 언제나 문제는 나였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한계로 몰아붙이고 있었던 거다.
‘나도 사람이에요. 어떤 상황이래도 최소한 연락 한 통은 줄 수 있잖아요. 이런 배려도 없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어요?’
‘최윤. 너 진짜 지난번부터 사람 질리게 한다. 대체 뭐가 문제야?’
기분 내키는 대로 널 휘두르고 너에게 말을 막 쏘아대고, 네가 설령 맞는 말로 나에게 대꾸하면 회피하고. 쓰레기였네, 윤화평.
하나가 떠오르니 수면 위로 계속해서 내가 저질렀던 오만함과 이기심이 부른 행동들이 계속 드러났다. 작고 작다고 생각했던 균열들의 가짓수가 늘어갈수록 내 스스로의 추악함 역시 거울로 비추듯 세세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왜 자꾸 전화 피하는 거예요?’
‘네가 필요 이상으로 전화한다는 생각은 안 해?’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숨이 막힌다, 진짜. 내가 어떻게 매 순간 네 전화를 다 받아.’
‘내가 언제 내 모든 전화를 받아달라고 했어요?’
지쳐가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너의 지친 그 목소리, 울음이 섞인 것 같은 그 목소리. 나는 그게 왜 듣기 싫었을까.
‘그래요. 맞아요. 당신 말이. 내가 필요 이상으로 전화를 했어요. 근데, 당신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나한테 먼저 연락한 적 없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때 당신이 나한테 했던 말이요. 날 사랑하긴 해요?’
너의 의심이 당연한 수순인 건데. 사랑하는 사람이 귀찮을 리가 없는데. 그때의 난 왜 네 의심이 날 시험하는 걸로 보였던 걸까. 너의 그 행동에 화를 내며 분노하던 그때의 난, 너의 비참해하는 심정을 왜 알지 못 했을까.
‘내가 뭘 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날 믿을 거야?’
떠올릴수록 가관이고, 떠올릴수록 비극이었다. 후회로 점철된 모든 순간들이 너에게는 비수였을 거다. 그걸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제발 내가 당신을 믿게 해줘요.’
너는 계속해서 내게 기회를 줬는데. 난 왜 매번 그 기회를 헌신짝처럼 집어 던진 걸까.
‘윤화평씨. 당신 저번부터 내 눈도 안 마주치고 짜증만 내고 있는 거 알아요?’
‘또 뭐 때문에 이래.’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아요. 당신 내 이야기 안 듣는 거 알아요.’
‘그러는 너는. 너는 내 이야기 듣고는 있어?’
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얼마나 너에게 못된 말만 했는데. 그렇게 모질고 상처 주는 말만 해대면서 너에게 내 이야기를 왜 듣지 않는 거냐고 분개하던 내 모습이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왜 그때는 몰랐던 걸까.
‘…그래요. 안 듣고 있어요. 그래도 당신처럼 눈을 피하진 않아요.’
‘그만 좀 해라. 제발! 너 때문에 숨이 막혀. 최윤. 나 진짜 힘들다.’
‘아. 그 말은 좀 상처네요.’
‘…아. 미안.’
그리고 비로소 그 후회로 점철된 순간들의 결말이 다가왔던 거다. 오만하고 안일하고 이기적이었던 나와 늘 울기만 했던 너와의 러브 스토리의 결말이.
‘아니요. 당신 진심이 이제야 보이네요.’
‘최윤….’
‘우리 헤어질까요.’
‘야. 너 왜 또 갑자기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자기 가슴 찢으며 견뎌왔던 너인데, 그 말을 내뱉던 그 어린 날의 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상상도 가지 않지만 상상을 하자니 목만 메인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이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자꾸만 의심되고 불신하고, 그러다 결국 내 마음 속에 남은 마지막 질문은 늘 하나였어요.’
‘그게 뭔데.’
‘윤화평씨가 나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있긴 한 걸까?’
너에게 진심이 닿지 않을 정도로 나는 나밖에 몰랐고, 너는 나밖에 몰랐다.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의 관계가 ‘이해’만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걸 몰랐던 그때의 난.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뻗었던 그 손을,
‘하. 미치겠네.’
‘….’
너무도 간단하게 내쳐버렸다. 그깟 자존심 하나 때문에.
‘그래. 나도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지친다. 헤어지자. 헤어지자 그래.’
결국은 그거였다. 서로를 너무 믿었던 거다. 우리는. 바보같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는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줄 거라 믿었던 그 굳은 믿음이 결국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던 거였다. 그게 결국 불신이 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우리의 관계는 병들어가고 있었던 거다. 솔직하지 못하고, 좀 더 배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닌 일들인데.”
“…그랬었죠. 그때는 엄청 날카로운 것에 깊게 베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주 얕은 칼이었더라고요. 그래도 흉터는 깊게 남았지만요.”
“미안하다.”
“아니요. 내 잘못도 있어요.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가 쌓아올린 성이 부실했던 거니까. 그래서 그렇게 무너진 거예요. 순식간에. 와르르.”
아주 사소하고 그냥 넘길 법한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견고하고 단단했던 그 모든 것에 균열을 일으켰고 결국 우리는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없이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난 부정할 수 없었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었던 내가 그 균열에 큰 역할을 했음을 이제는 깨달았으니까. 퇴색되고 빛 바래버린 우리. 반짝반짝 빛났던 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찬란했던 시간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어쩐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제라도 서로에게 진심으로 그 시간을 되짚어 본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서가 되질 않았다. 난 왜 그 순간을 그렇게밖에 대처하지 못했을까.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아 계속 기울인 술잔이 결국 여러 병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못가 무거운 눈꺼풀이 감기며 너의 모습이 흐려졌다. 마치 우리가 헤어졌던 그 순간처럼.
* * *
“으음….”
눈이 부시게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롭다 못해 뜨거워서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러자 옆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무언가에 눈이 번쩍 뜨였다.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켜 내 옆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한 번 보고 내 몸을 내려 보았다. 완전 알몸. 완전 온 몸 구석구석 붉게 물들고, 뻐근한 허리까지. 이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불을 살짝 들춰 옆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살피고는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렸다. 미쳤어, 미쳤어. 최윤. 미쳤다고. 곤히 잠들어있는 윤화평씨의 낯짝이 얼마나 두껍고 얄미운지. 또 이 얼굴에 홀라당 넘어간 게 뻔한 내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화가 났다. 무덤덤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쿨 한 척 해보자고 수 백 번도 더 다짐했는데. 이 바보 같은 놈!
괜스레 욱해버려서 손을 들어 윤화평씨의 등짝을 후려갈겨버렸다. 찰싹! 진짜 방 안 전체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에 악! 하며 벌떡 일어나는 커다란 놈.
“아, 아프잖아!”
“아파요? 아프긴 해요? 아프단 말이 지금 나와요?”
어지간히 아픈지 맞은 곳을 몇 번 손으로 문지르던 윤화평씨가 갑자기 나를 끌어 안아온다. 한때는 익숙했지만 이제는 낯선 그의 포옹에 놀라서 화평씨를 밀어냈다.
“윤아. 어제 우리 좋았잖아. 어? 나한테 매달렸잖아.”
“조용히 못해요?”
아주 뻔뻔함이 하늘을 찌른다. 능글맞게 구는 것도 하나 변한 게 없다. 당신은 여전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좋아했지만 나를 상처 줬던 그 모습 그대로다.
“나 어제 많이 반성했어. 나 진짜 나쁘고 이기적인 놈이었다는 거 깨달았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진짜, 진짜 잘 할게. 이제 진짜 잘 할 수 있어.”
“뭘 줘요? 기회?”
“그래. 우리 다시 시작하자.”
여전히 당차고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성미까지. 나는 당신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다시 만난 어제, 심장이 멎는 듯 했고,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당신을 잊기는 한 걸까. 당신이 떠난 그 날 이후 정확히 1년을 울면서 가슴 치며 지냈는데. 무덤덤해졌다고 믿었던 순간, 당신과 마주치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는데. 정말 다 잊은 걸까. 당신은 어떨까. 당신도 나랑 같은 기분일까. 그때 이후로 당신은 어떻게 지냈을까. 윤화평씨는 나를 싹 다 잊었을까. 홀가분했을까. 그토록 괴로워했던 당신이 나를 떠나 행복했을까. 그때 했던 모든 말들이 진심이었을까.
“싫어요.”
“왜.”
“우린 이미 산산이 깨진 관계에요. 한번 깨진 것은 다시 붙을 수가 없어요. 억지로 이어봤자 결국 다시 똑같은 모양새로 깨져 버릴 거예요.”
그래서 저질렀던 어제의 일이 후회가 됐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당신과 볼 수 있는 이 상황을 유지해보려고 저지른 어설픈 욕심이 또 헛된 희망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라니까. 내가 더 노력할게.”
“지금 할 수 있는 노력을 그때 못 해서 헤어진 건데 지금에 와서 그 노력이 무슨 소용이에요?”
“최윤, 제발. 너도 나 좋아하잖아. 나 알고 있어. 내가 널 모르냐? 난 여전히 너 사랑해. 넌 아니야?”
어제의 당신을 보고 난 깨달았다. 난 당신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가슴치고 앓고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어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단지 그 방법이 비틀어져 서로를 힘들게 했다는 걸. 당신 역시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이 들었지만.
“윤화평씨. 나는요. 어제까지의 윤화평씨와 나의 관계가 좋았어요.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덤덤하게 그때를 떠올릴 수 있는 그런 관계요. 더 이상, 그 거리보다 더 윤화평씨랑 가까워지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과 다시 시작할 확신은 들지 않았다. 어제의 우리의 관계. 술을 한잔 기울이며 과거 있던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쿨할 수 있는 관계. 딱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당신도 힘들어하지 않고 나도 상처받지 않고 서로가 만족스러운 이정도의 거리면 우리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너 아니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서. 난 단 한순간도 너 잊은 적 없어. 그때 내가 먼저 널 차버렸지만, 그래도.”
그때는 어렸다. 하지만 어렸다는 말로는 전부 메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들이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이대로 영영 안보고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어제 용기를 낸 거고, 그 술자리 덕에 당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고, 새로운 우리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알아요. 나도 윤화평씨 잘 아니까. 근데. 나 자신 없어요. 또 그러지 않을 거란 자신이요. 난 이미 그때처럼 열렬하게 당신을 사랑할 자신도, 그때처럼 마음이 병들지 않을 거라는 자신도. 다 없어요.”
“최윤….”
“당신 진심 알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근데요. 이해한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게 동의는 아니잖아요. 우리 이미 그런 실수 경험했잖아요. 실수는 거기까지로 해요.”
하지만 언제나 당신만은 내 계획과 계산에서 벗어났다. 화평씨는 거침이 없고 저돌적이고 계산 같은 거 없이 본능이 이끄는 대로 돌진하는 그런 짐승 같은 사람이었다. 나와 정반대였던 그런 당신의 모습에 끌렸음에도 언제나 난 계산적으로 당신을 대했다. 그런 내 모습을 알게 되면 당신이 얼마나 날 경멸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럼 어제 왜 커피 마시자고 한 건데!”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때의 당신이 내뱉은 모진 말들이 전부 진심이었던 건지.”
“윤아. 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잘 알겠어. 네가 얼마나 아팠었는지 잘 알겠다고. 내가 정말 죽을 만큼 잘못했다는 것도 알겠어. 미안한 마음도 크고. 이런 내 진심 받아주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제 당신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왜 커피를 마시자했는지. 그 이유를 다 말하지 못했다. 내가 왜 당신을 거절하는지.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왜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는지 진심을 말 할 수 없었다. 이런 나와 전혀 다른 당신이. 어쩌면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들끼리. 행복한 결말을 꿈꿀 수 있는 걸까.
“봐요. 당신은 지금도 당신 감정이 우선이잖아요.”
“아, 그건…!”
“괜찮아요. 사람 쉽게 안 바뀌어요. 그게 내가 당신과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이유에요. 결국 우리는 같은 이유로 다시 조각날 거예요.”
“윤아, 제발.”
“당신 탓 하는 거 아니에요. 내 잘못도 있다는 거예요. 난 또 메마를 거고, 또 당신에게 족쇄를 채울 거고, 또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내 마음이 병들어가는 만큼, 나는 더 당신을 귀찮고 힘들고 지치게 만들 거예요. 그럼 결국 되풀이잖아요. 그러니까 무의미한 감정소모 그만해요, 우리.”
난 그 전제를 하지 않기로 했다. 연인이 아니라도 함께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서로에게 무조건적 이해를 구하지 않고, 서로가 너무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그래. 우리는 딱 그 정도의 관계로 남아있어야 한다.
“최윤! 네가 뭐라고 해도 나 너 포기 안할 거야. 나는 너랑 이 침대에서 같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결심했어. 내 머릿속엔 너랑 다시 시작하는 꿈으로 가득 차버렸다고.”
당신도 나도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서로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행복하지 않은 관계는 지속될수록 서로를 괴롭히는 것 밖에 되지 않아. 난 당신이 불행한 게 죽기보다 싫다. 그 불행의 원인이 나라면 더욱 더. 그러니까 난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윤화평씨의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다. 더 매몰차게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럼 깨세요, 그 꿈에서.”
나는 이 침대에서 일어나 당신을 마주한 순간, 두 번 다시. 윤화평의 연인이 되지 않을 거라고 결심 했어요. 같은 침대에서 다른 꿈을 꾼 우리 두 사람이 다시 깨지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
만약 또 한 번 그렇게 된다면 우연이라도 이렇게 만나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그런 관계도 될 수 없을 테고 내 인생에서 윤화평이란 존재는 아예 사라지고 말테니까. 그것만큼 겁나는 건 이 세상에 없어요. 연인의 형태가 아니어도 좋아요. 당신이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난 결코 당신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이 헛된 욕심에 희망을 걸지 않게 내게서 멀어져 주세요. 윤화평씨. 당신을 밀어내기엔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제발.
당신이란 꿈에서 내가 깨어나게 당신이 멀어져줘요.
~ 동상이몽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