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내게 죽은 척을 한다
그 날은 눈물의 날이로다
W.RA
“윤화평씨, 어디 계십니까?”
최윤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두리번거렸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최윤, 도착했어? 뭐가 그렇게 급하길래 통화 첫마디가 그거야.”
화평이 한 발 뺐다. 즉각 답이 나오지 않자, 별 것 아닌 일임에도 조급해졌다.
“빨리 어딘지나 말하세요.”
“됐어, 거기 있어. 굳이 네가 이쪽으로 안 와도 돼.”
“싫습니다.”
“아이고, 알았어어. 지금 손 흔들고 있는데, 보여?”
최윤은 화평의 손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제 길을 찾아 가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한데 모여 울렁거렸다. 이곳은 마치 바다 같았다. 저 멀리 화평의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발걸음을 떼자,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최윤은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걸을수록 인파에 치여 애쓰는 몸뚱이가 뒷걸음질 쳤다.
“윤화평씨.”
최윤은 손을 뻗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바닷물로 바뀌어 최윤을 삼켰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손을 휘저으며 발버둥쳤다. 무섭다. 무서웠다.
“운화평씨, 대답하세요.”
전화기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뒤섞였다. 윤화평씨,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뻣뻣한 몸이 사정없이 휩쓸렸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윤화평!”
웅웅거려 닿지 못했다. 화평의 손이 아른거렸다. 윤화평, 윤화평… 거기에 있는 걸 아는데, 우리는 철저히 혼자였다. 눈 앞에서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이젠 오지 말라고,
그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
Tractus
난파된 배의 조각이 떠내려와 모래사장에 박혔다. 딱 그 모양새였다. 침대 시트는 모래처럼 버석했다. 산산 조각난 배의 일부분은 이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최윤은 두 손을 배 위로 곱게 포갰다. 멍청하게 눈을 꿈뻑이니, 눈물이 눈꼬리를 지나 귓가로 흘렀다. 귀에 물이 차는 느낌은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최윤은 물기를 닦았다.
주여, 모든 죽은 신자의 영혼을
남김없이 죄의 굴레에서 풀어 주옵소서.
그들이 주의 은총의 도움으로
형벌의 선고를 면하고
영원한 광명의 행복을 즐길 수 있게 되도록.
최윤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기 위한다면 꿈은 쓸데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축하고 눅눅하게 따라오는 우울감을 지울 수 없었다. 발걸음을 질질 끌며 자리를 옮겼다. 걸음마다 미련이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몹시 권태로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윤화평씨, 제가 당신에게 미련을 가지면 안 되는 겁니까?
의미 없는 꿈의 내용을 되짚어 보며 물컵을 꺼냈다. 물을 따르는 손길이 넋이 나가 있었다. 머리에 열이 몰려 어지러웠다.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물이 컵 밖으로 넘쳐 흘렀다. 그제야 알아챈 최윤은 물통을 내려놓았다.
죽은 이의 꿈은 자꾸 꿔서 뭐 하나. 꿀 수록 힘들기만 했다.
최윤은 물을 마셨다.
*
淨天地解穢神呪
윤화평은 최윤과 길영이 자신을 찾는 꿈을 꿨다. 자꾸 어디냐고 소리치는 그에게, 절대 어딘지 알려주지 않았다. 찾지 말라고 했다. 꿈이 아닌 어디선가 정말 자신을 찾고 있을 게 너무 뻔해서.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아직 확신이 없다고. 그것이 사라졌는지. 윤화평은 그들에게 다시 불행의 시작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였다. 그래서 외로웠다.
윤화평은 꽤 익숙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긴 머리카락 사이로 흰 눈동자가 보였다.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거울 앞에 섰다. 내가 이런 모습이구나. 신경 쓰지 않고 산지 오래된 것 같았다. 상관없었다.
보고 싶었다고, 날 찾아달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날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찾아오지 말라고. 대신 그런 말을 했다. 최윤의 목을 조르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길영의 손등을 찌르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내 손으로.
윤화평은 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절대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그 날, 혼자 모든 것을 안고 가기로 작정했다.
나는 죽었다.
윤화평은 두려웠고, 불안했다. 확신은 영원히 서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철저히 혼자였다. 꿈에서도 그들을 피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얼굴에는 착실히 고독이 스며있었다. 윤화평은 동그란 눈을 몇 번 꿈뻑였다.
목에는 붉은 묵주가 걸려 있었다.
……간사한 귀신을 묶어 놓고 요사한 귀신은 베어내어 천만의 귀신을 죽여 없애느니라……
천지정명 예기분산 동중현허 황랑태원 팔방위신 사아자연
영보부명 보고구천 건라답나 동강태현 참요박사 살귀만천
중산신주 원시옥문 오송일편 각병연년 안행오악 팔해지문
마왕속수 시위아헌 흉예소탕 도기상존 급급여률령
*
네가 살길 원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 아이러니. 이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길이, 죽음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한 발 뺀 채 모두를 대했다. 언제든 돌아설 수 있게. 그래서 어디든 정착하지 못했다. 동그란 눈이, 둥글둥글한 성격이, 구르고 굴러 무뎌진 마음이.
둥글어서 한 곳에 멈추질 못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이유로 마음이 도려내진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상처로 벌어진 틈을 비집어,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것은 썩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만난 이유가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달려온 길이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를 만나서 다행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나는 잃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육광이형, 할아버지를 잃고. 내게 남은 것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너를 어느새 사랑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나의 탓. 그래서 나는 나를 잃기로 했다.
등 떠밀려 죽어가는 도중에, 너를 사랑했을 뿐. 너의 탓은 하나도 없다고. 화평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의 자신이 잠시 스쳐 지났다. 익숙했다.
죽음을 각오했고, 고민은 원래 오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지쳤고, 다쳤다.
죽는 것이 쉬울까? 쉽지 않다. 온 몸이 떨려 푸드덕거리는 작은 새 같은 마음이,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숨기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 사라지기 쉽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날, 네가 죽음으로서 나를 구마하려 할 때. 아주 조금의 안도와 치사량의 불안이 공존했다. 하지만 우리 같이 피 흘리며 싸웠을 때. 정신 없이 헤엄치다 달빛과 파도가 뒤섞였을 때. 내가 내가 아니었을 때.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절망 원망 자책 사랑 오기로 새긴 경이 온 몸에서 욱신거렸다.
‘죽여줘요.’
서로를 살리려 서로가 죽으려 했던 바다.
동쪽 바다에서 넘치는 몫의 불행을 이끌고 온 손, 나의 몸에 봉했으니, 나의 손이기도 했다. 너는 내 손을 잡았고 나는 놓았다. 이제 내가 죽을 차례였다. 그 뿐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너였다. 가장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너였다. 나는 그 날 바다에서 박일도와 함께 죽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날 찾아달라고, 날 보러 와달라고. 꿈에서도 찾지 말라 말하면서, 마음은 참 이상했다. 자꾸 행복하고 싶었다.
너에게 죽은 사람으로 남길 빌면서, 다시 보길 희망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죽는 것. 그럼에도 다시 바다로 가지 않은 것.
목에는 붉은 묵주가 걸려 있었다.
*
예언이라 하기엔 과분한 저주를 숨기고, 상처를 숨겼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숨긴 것은 윤화평, 당신이었다. 당신은 삶을 숨기고, 죽음도 숨기고, 당신도 숨겼다.
그 날, 자꾸만 가라앉는 당신을 찾아 헤엄쳤다.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쉴 새 없이 울고 있었다.
거기 있는 걸 아니까. 당신 혼자가 아니니까. 등 떠밀려, 파도에 떠밀려, 외롭게 죽지 않게.
온 몸으로 피 흘리는 당신을 붙잡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했다. 내 죽음으로 당신을 구하기를.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넜다. 이제는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었다. 당신이 택배 주소지를 다른 곳으로 적지 않은 것은, 당신의 허술함일까. 아니면 조금의 미련일까.
당신이 살아 있으면 좋겠어.
나를 찾지 마.
당신을 찾고 싶어.
나를 찾아 줘.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죽는 것.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아 죽은 척을 한 것.
최윤과 길영은 화평을 찾았다. 한 번의 죽음을 보내고 다시 손을 잡았다.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웃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목숨의 덤. 윤달 아래 행복하게.
손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오래도록 서있다.
죽어야 끝나는 끈질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 행복하기 위해서,
죽지 않고 죽은 척을 한다.
사랑은 내게 죽은 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