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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수박화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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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최윤은 그것도 사실은 너무 오래된 말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멀쩡히 동네를 지키던 강산은 3년 만에도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대규모 주거복합단지로 바뀌곤 하니까. 그런데 왜, 최윤은 윤화평을 짝사랑하는 일을 강산도 변하고 만다는 십 년 동안이나 계속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지만, 윤은 정말로 화평을 이제는 좀 그만 좋아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고깃집 여기저기에서 왁왁 터지는 웃음소리 하며 그를 묻기 위해 더욱 키워둔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소리가 윤의 귀를 괴롭혔다. 화평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윤은 한 번도 화평의 말에 뭐라고? 하며 되묻지 않았다. 이번에도 윤화평은 몇 번째인지 모를, 사실은 별 애정도 없었던 여자친구와의 이별을 핑계로 윤을 불러내어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화평은 두툼한 삼겹살을 가지런히 잘라 철판 위로 착착 올려놓는 아르바이트생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별로 슬프지도 않은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다.


“너 연주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난 진짜 사랑했거든?”


웃기고 있네, 윤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아르바이트생이 제 앞에다 밀어주는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화평은 윤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윤화평은 항상 저런 식이어서, 윤은 이제 화평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슨 말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다 익은 고기를 괜히 화평의 앞으로 밀었다.


“맞아, 나 정연주보다 최윤 더 좋아하잖아.” 


윤은 고깃집이 조금 더 시끄러워서,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도 소란 속에 화평의 소리가 파묻혀버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짜증스레 입에다 소주를 털어 넣었다.

 

 

윤화평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꽤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늘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을 했고, 말이 좀 틱틱거리면서 나오긴 했어도 행동거지는 다정해서 주변에 사람이 항상 넘쳤다. 보통 사람들은 윤화평의 최소한의 선을 몰랐다. 윤화평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울타리가 아주 넓고 그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사실은 윤화평의 마음속 울타리는 자신의 그것보다도 더 좁을 거라고, 최윤은 자주 생각하곤 했다. 


최윤의 입장에서 윤화평은 짝사랑 상대로는 최악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사람이라는 것부터가 우선 문제였다. 얼굴도 성격도 꽤 괜찮은 윤화평한텐 사람이 잘 꼬였고, 윤화평은 또 오는 사람은 안 밀어내고 가는 사람은 붙잡지 않는 똥차 같은 마인드를 가진 인간이라 사귀기도 잘 했다. 10년째 그걸 지켜보면서 타들어 가는 최윤의 속도 모르고.


솔직히, 화려한 윤화평의 연애사는 둘째 치고 윤에게 화평이 최악의 짝사랑 상대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화평은 윤을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으면서 늘 윤에겐 다정하게 굴었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아주 협소한 윤화평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 중에는 분명 윤이 있었다. 윤이 무슨 일이 있어 다치게 되거나 아프면 화평은 엄마보다도 더 유난을 떨어 댔다. 살집도 없는 게, 이러니까 아프지. 뭘 챙겨 먹기는 해? 투박한 손으로 팔뚝을 잡아채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버티는 윤을 식당이며 병원 같은 곳에 기어이 데려가고야 마는 게 윤화평이었다. 


최윤은 그런 윤화평이 싫었고, 윤화평을 싫어하면서도 짝사랑을 그만두지 못하는 저 자신도 싫었다. 윤은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자신이 10년간 윤화평을 짝사랑하는 걸 관두지 못한 건 화평의 탓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며 화평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십년간 윤화평이 최윤에게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저지른 만행을 모두 설명하자면 이틀 날밤을 까도 모자랐다. 윤화평은 중학교 3학년 때는 같은 고등학교에 가자고 윤을 졸랐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같은 대학교에 가자고 윤을 졸랐다. ‘나 이 학교 갈 건데, 너 성적 안 되잖아.’ 윤의 그 한 마디에 저보다 월등히 성적이 좋은 윤과 같은 대학교에 가겠답시고 난생 처음으로 독서실 월 정액권을 끊는 걸 보고 윤은 기함했다. 2년을 내내 탱자탱자 놀던 놈팽이가 전교에서 10등 안에 드는 최윤이랑 같은 학교를 간다고? 주변에서 하나같이 화평을 무시했는데 화평은 결국 수능에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받아보는 어마무시한 점수를 받고 윤과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입학했다. 것도 모자라 아예 학교 앞에서 최윤이랑 같이 살겠다고 박박 우겨대는 화평을 말리느라 화평의 부모님과 윤을 고생시킨 건 논외로 한다 쳐도, 동반 입대를 하자고 했던 화평의 발언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렸다. 동반 입대 대신 의경 지원을 같이 해서 입대와 전역 시기만 맞추는 걸로 합의를 보긴 했지만, 하여튼 화평은 늘 이런 식으로 윤의 옆에 꼭 붙어 다녔다.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 그렇게 말하는 화평의 입에다 주먹을 넣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헤테로들은 다 이런 거냐고, 최윤은 게이들이 글을 올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다 구구절절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최윤은 윤화평과 사귀고야 말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늘에 맹세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화평의 수많은 연애 상대나 원나잇 상대 중에 남자는 없었으니까 최윤은 윤화평이 헤테로라는 걸 99.9퍼센트 확신했다. 그리고 사실, 윤화평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동성애적 자아가 길을 가다가 벼락을 처맞고 갑자기 깨어나게 되더라도 윤화평은 최윤에게 ‘넌 내 소중한 친구잖아.’라고 얘기하면서 다른 남자를 사귈 것 같았기 때문에 윤화평이 게이가 아니기를, 이대로 늘 여자만 주구장창 만나다 결혼이나 하고 애나 낳으면서 잘 살기를 윤은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나 애인 생겼다, 윤아.”


그러나 하늘은 늘 최윤의 편이 아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한때 신학교 진학까지 꿈꿨던 윤에게는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윤은 윤화평이 내민 핸드폰의 액정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애의 사진을 보면서 속으로 하느님 욕을 좀 했다. 씨발, 신이시여….


새로 사귄 애인 이름은 강민성이라고 했다. 같은 학교의 기계공학과에 다니고 있고, 연주랑 헤어지고 꿀꿀해하던 차에 친구를 따라서 간 게이바에서 만났다고 했다. 최윤은 이름도 얼굴도 모를 윤화평의 어떤 게이 친구를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열 대쯤 때리면서 어, 그래…. 축하해. 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

 


팔로 침대를 밀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손발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서 윤은 자는 동안에 누가 팔다리에 추라도 달아 놓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이불 속에 있는데도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는데, 이상하게 등줄기에선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겨우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내면 잔뜩 갈라져 듣기도 싫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한숨을 푹 내쉬며 당연하게도 화평에게 연락을 하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아서 머리맡을 더듬었다가, ‘나 내일 강민성이랑 놀이공원 감!’ 하던 화평의 메시지를 겨우 기억해낸 윤이 팔을 다시 이불 안으로 넣고 매트리스 위에 몸을 옹송그렸다.


윤은 연례행사처럼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꼭 이렇게 아프곤 했다. 그리고 윤의 동절기 연례행사에는 늘 화평이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앓아누워선 오르는 열에 정신을 못 차리고 끙끙대는 윤의 옆에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취소하고 물수건을 갈아주던 화평은 ‘그러게 좀 잘 먹으라니까.’ 하고 잔소리를 하긴 했어도 한 번도 너 때문에 애인이랑 못 놀게 됐다느니, 하는 모진 소리는 한 적이 없었다. 언제부턴가는 윤이 아플 걸 예상이라도 했단 듯이 가을 중간고사가 끝난 후에는 약속도 잡지 않던 화평이었다. 윤은 늘 자신을 신경 쓰지 말고 나가서 놀라고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진짜로 윤화평이 저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놀러가버렸다는 걸 생각하니까 갑자기 속이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아프면 뭐든 다 서러워지는 법이다, 나는 지금 너무 예민해져서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거다, 이렇게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데이트가 친구보다 더 중요한 건 당연한 일인데, 이제야 우선순위가 바로잡힌 것뿐인데, 이제야 제가 원하는 대로 윤화평이 움직여주는 건데 왜 서러운 건지. 눈물이 죽죽 났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울음을 참던 윤은, 조금 후에 화평이 우스꽝스러운 호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웃는 사진을 보내온 걸 확인하고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꼴사납게 울음을 터트렸다.


 

민성이가, 강민성이, 걔가……. 윤은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어제 놀이동산을 다녀왔다며 잔뜩 신이 난 화평은 아침부터 윤의 자취방에 불쑥 들어와서는 겉옷도 벗지 않고 신나게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의 데이트가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윤도 화평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는데, 딱히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꾸 윤화평이 강민성과 어디 음식점─지난달에 윤이 가고 싶다고 말했었던─에 갔는지, 놀이공원에서는 어떤 걸 탔는지, 그런 쓸데없는 정보들을 마구 말하는 게 귀에 쏙쏙 박혔다. 

윤은 의미없이 틀어놓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임팔라 한 마리가 사자에게 쫓기는 장면을 세상 다시 없을 미스터리 스릴러 명작이라고 세뇌하며 시청했다. 담요를 두르고 앉아 흐리멍덩한 눈으로 티비를 응시하면서 응, 그렇구나, 하고 영혼 없이 대꾸해준 지도 벌써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화평이 집으로 온다길래 아팠던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삼켰던 해열제의 약효가 다 됐나 보다. 사자가 결국 임팔라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장면을 보고 있다가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은 머리를 살짝 젓고는 담요를 손으로 꾹 잡고 그대로 몸을 눕힌 윤이 눈을 내리감았다.


“뭐야, 자?”


“응.”


“왜. 내가 너무 민성이 얘기만 해서 삐쳤어?”


윤은 대답 없이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아, 최유운. 윤이 성질을 못 이기고 화를 낼 때마다 부르던 주욱 늘어진 목소리로 화평이 윤을 불렀다. 온 몸을 돌돌 감싼 담요 위를 손으로 쓱쓱 쓸어내리던 화평이 기어이 윤의 몸과 담요 사이로 제 손을 욱여넣었다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윤의 어깨를 돌려 제 얼굴을 보게 했다.


“너 아팠어?”


“…“


“야. 최윤.”


 딴에 윤화평이 엄한 목소리를 냈지만, 윤은 고집스레 다문 입을 열 줄을 몰랐다. 화평의 차가운 손바닥이 윤의 이마 위로 얹혔다.


“열 나는데 왜 나 안 불렀어?”


“…에버랜드에서 노는 애를 어떻게 불러.”


“그렇다고 이걸 또 그냥 참고 있었어? 너 미쳤냐?”


“불렀으면 뭐 어쩔 건데. 데이트 접고 올 것도 아니잖아.”


화평이 그 말에 장난으로라도 평소처럼, ‘민성이보단 네가 더 중요하지!’ 했었다면 윤은 화평을 한 대 때렸을 것이다. 물론 긍정의 의미를 내포한 침묵이라고 해서 반가운 건 아니었지만. 화평은 달리 할 말은 없었는지 서늘한 손으로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한 윤의 이마를 짚으며 미안, 하고 사과했다. 뭐가 미안한데?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 윤은 속으로 말을 삼켰고, 어색한 정적 속에서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 번호를 알리는 티비의 CM송만이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차라리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고 최윤은 잠깐, 아주 잠깐 후회했다.


화평은 익숙하게 윤의 자취방을 이곳저곳 들쑤셨다. 수건에 물을 적셔 윤의 머리 위에다 척 올려 주고는 밖에 나가서 죽과 약을 사 들고 왔다. 아까 약 먹어서 안 먹어도 돼, 하고 힘없이 대꾸하는 윤을 끌어다 식탁에 앉히고, 닫힌 입 앞에다 시위라도 하듯이 죽이 듬뿍 올라간 숟가락을 고집스레 들이미는 화평에 윤은 결국 제 손으로 숟가락을 잡아야만 했다. 죽을 먹는 걸 가만 지켜보던 화평은 윤이 그릇을 싱크대 안에 넣고 뒤돌아서자마자 손바닥 위에 빨간 알약 두 개를 미지근한 물이 든 컵과 함께 내밀었다.


“좀 있다가 먹을래.”


“그냥 먹고 얼른 자.”


“아, 소화 안 돼서 싫어.”


“얼마 먹지도 않았잖아, 너. 반 그릇도 안 먹어 놓고는.”


잔소리에 한숨을 푹 내쉰 윤이 손을 내밀었다.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화평이 윤의 손바닥 위에 약을 올려놓으며 최윤, 화났냐? 그렇게 물었다.


“화날 게 뭐가 있어. 피곤해서 그래.”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어, 아니라니까. 내가 잘못해서 아픈 건데 왜 너한테 화를 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하고는 약을 물과 함께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어제 실컷 울기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윤은 생각했다. 


“잘 거야?”


윤이 대답 없이 이불을 끌어당겨 목 위로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평은 다시 윤의 뜨끈한 이마 위로 손을 얹어 열이 내렸는지를 확인하고선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잠깐만 나갔다 올게.”


화평이 윤의 눈치를 살피며 얘기했다. 아무래도 또 애인을 만나기로 한 모양인지 꼭 집에 맛있는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윤은 애써 푸스스 웃는 소리를 냈다.


“윤화평 너 걔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네. 꿀단지 숨겨놓은 것처럼 굴고. 나 신경쓰지 말고 애인 만나러 갔다가 집 들어가. 춥다.”


“아니야. 잠깐 전해줄 거 있대서, 그거만 받고 바로 올 거야. 너 아직 아프니까.”


“됐다니까. 어차피 나 이제 잘 거야. 너도 데이트하러 가.”


진짜 괜찮아? 아프면 연락해, 병원 가게. 몇 번이나 윤에게 물어보던 화평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윤을 한참 쳐다보다가 알았다고! 하고 윤이 언성을 높이는 걸 듣고서야 등 떠밀리듯 느릿느릿 신발을 주워 신었다.


“아 맞다. 최윤, 다음에 강민성이랑 밥 한 끼 먹을래? 민성이가 너 궁금하대.”


엿 먹이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 싶었다. 최윤은 윤화평이 돌아가고 나면 꼭 커뮤니티에다가 글을 써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겉으로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윤화평은 어, 진짜? 알았어. 그럼 나 약속 잡는다? 하고 신이 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


“개새끼….” 


닫힌 문을 가만 쳐다보다가 윤이 중얼거렸다. 최윤은 정말로, 진심으로! 윤화평을 그만 좋아하고 싶었다. 근데 어떻게 좋아하는 걸 관둘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일부러 수강 신청에 실패한 척 빡세기로 소문난 아침 수업만 골라 듣는 것도 이골이 났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윤화평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으니까 화평이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어서 아예 멀어지게 만들고 나면 짝사랑도 어떻게든 정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지끈거리는 머리로 최윤은 신에게 빌었다. 강민성이랑 양다리 걸치는 거 윤화평한테 들키게 해 주세요.





열에 달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빈 소원을 하느님이 들어주는 건지, 그 뒤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윤화평이 게이가 아니게 해달라고 빌 때는 죽어도 제 편이 아닌 것 같던 하늘이 그제야 최윤을 미친 듯이 돕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윤화평은 제 남자친구에게 최윤을 소개해주는 식사 자리를 만들었고, 둘은 화평이 술을 마시면 연락을 하겠단 걸 명목 삼아 자연스레 번호도 교환했다. 화평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윤은 화평에게 ‘민성 씨, 되게 좋은 사람 같네.’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막상 집에 돌아와서 연락을 하려니까 양심이 좀 찔렸다. 짝사랑을 끝내겠다고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연락하는 걸 관둘까 하다 지금 끝내지 않으면 윤화평과 강민성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게 자신일 수도 있다는 아찔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민성씨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만나뵀으면 좋겠습니다. -최윤]


 

 

이후 윤이 죄책감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윤화평의 남자친구가 윤에게 먼저 연락을 하면서 의외로 일은 수월하게 돌아갔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라고 아침마다 꼬박꼬박, 반말로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에 윤은 ‘근데 왜 맨날 반말하세요?’라고 채팅을 쳤다가 차마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문장을 지우고는 ‘네, 민성 씨도요.’ 라든지, ‘민성씨 메시지 덕에 오늘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온라인 교양 수업의 중간고사를 뒤늦게 준비하느라 바쁜 화평의 눈을 피해 몇 번 만나고 나서, 강민성은 최윤에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하고 삼류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고백했다. 윤은 마음 한켠이 꾹꾹 찔려오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수줍은 척 민성의 셔츠 소매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쉬워도 너무 쉬웠다. 꼬시고 뭘 하고,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윤화평은 왜 이런 쓰레기를 좋아하게 된 걸까. 민성과 또 식사 약속을 잡는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윤이 중얼거렸다.


이런 쓰레기 때문에 윤화평이랑 절연하게 생긴 최윤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



단정해 보이도록 회색 니트 위에다 검은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걸쳐 매는 윤의 손길이 비장했다. 화평이 종강 기념으로 민성과 데이트를 하는데 같이 만나지 않겠냐는 말에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민성에게는 화평을 만나기 전에 먼저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고 연락까지 취해둔 상태였다. 신발을 신고 거울을 보는데, 오늘 이후로는 윤화평과 아예 남남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


이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을 후회해서 뭐하나 싶어 한숨을 푹 내쉰 윤이 이내 집을 나섰다.



 

그래도 명색이 (마지막) 데이트인데, 윤은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윤의 신경은 온통 핸드폰으로 쏠려 있었다. 민성과 윤의 데이트에서 화평의 이름은 금기어여서 민성의 입에서 화평의 이름을 들을 수는 없어 다행이었지만, 대신 잔뜩 신이 나 해맑은 이모티콘과 함께 현재 본인의 외출 준비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 중인 화평의 메시지가 핸드폰 액정 위로 떠오를 때마다 윤은 심장이 발아래로 덜컥덜컥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사는 거구나. 윤은 민성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계속 시간을 체크했다. 지옥같은 식사가 얼른 끝나길 바라는 마음과 이 가게에서 나가서 마음먹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예 식사가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해서 입안으로 밀어 넣는 게 파스타인지 돌덩어리인지도 구별이 안 됐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화평을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함께 걸었다.


약속장소는 윤화평의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윤이 과제를 하러 자주 가는 카페이기도 했는데, 윤화평의 집에서 카페로 걸어오다 보면 상가 뒤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샛길이 하나 있었다. 첫 키스 장소로는 최악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윤은 카페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는 민성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 골목길 안으로 밀어 넣고 은근한 눈으로 민성을 쳐다봤다.


“…… 윤아, 키스, 해도 돼?”




민성이는 키스도 존나 못했다. 그게 최윤의 첫 키스 소감이었다. 입술이 맞닿기도 전에 혀가 마중 나오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이번이 첫 키스인 최윤도 알았다. 윤은 강민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후리고 싶었다. 윤화평은 어째서 이렇게 개같은 새낄 만난 걸까, 보는 눈도 진짜 없다, 불쌍한 새끼…. 그런 생각을 무심코 하고 나서 윤은 제 아랫입술을 침범벅으로 만들기 바쁜 민성보다 저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게 후리고 싶었다. 윤화평이 빨리 골목을 지나갔으면 좋겠다. 윤은 대충 혀를 움직이면서 골목 모퉁이로 눈을 돌렸다.


“…”


모퉁이에 윤화평이 서 있었다. 최윤은 윤화평의 눈을 마주하면서 보란 듯이 민성의 목에 팔을 두르고 더 세게 꽉 끌어안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심장이 거세게 쿵쿵 울렸는데, 윤은 그 와중에도 강민성이 자신과의 키스 때문에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 걸까 하고 착각할 것 같아서 억울한 마음이 잠깐 들었다. 윤화평은 제 십년지기 친구와 얼마 전에 사귀게 된 남자친구가 집 근처 골목에서 진하게 키스를 하는 걸 본 사람치고는 매우 평온한 표정이었다. 윤은 그 얼굴을 보며 민성의 볼을 감싸 쥐려 손을 떼어냈다가 화평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보기 좋게 올라가는 걸 목격하고 민성을 확 밀쳐냈다. 민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윤아? 하고는 침 범벅이 된 입술을 닦으며 윤이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 그… 화평아.”


민성의 목소리는 화평과 윤의 사이에서 철저히 무시당했다. 윤은 성큼성큼 화평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민성이 왠지 결연해 보이는 윤의 반듯한 등을 보면서 손을 뻗었다가 이내 벌어진 일에 다시 허억, 하고 숨을 삼켰다. 화평이 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기 때문이었다. 윤화평이 혹시나 최윤을 때리는 걸까 봐 민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울어, 최윤.”


“…….”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윤을 올려다보며 화평이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훔쳐 줬다. 뒤에서 실눈을 뜨고 그걸 숨죽여 지켜보던 민성은 화평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얼굴로 멀뚱히 서 있던 민성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 윤을 껴안은 채 어깨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꺼져, 하고 입모양으로 소곤대는 화평의 살벌한 얼굴에 후다닥 골목을 빠져나갔다. 


최윤이 고개를 들고 윤화평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럼 우리 사귀는 거야? 하고 히죽 웃는 화평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 전까지만 해도 둘의 분위기는 나름 애틋했다.


 

 

윤화평은 키스를 잘했다. 윤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하는 키스는 비릿한 피 맛이었다. 사탕처럼 달콤하고 황홀해서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키스 같은 묘사는 누가 처음 시작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던 윤은 화평이 혀로 입천장을 살살 간지럽히며 혀를 굴리는 탓에 이내 생각을 지우고 화평의 코트 자락을 손으로 꾹 쥐었다. 어쨌든 윤화평은 윤에게 맞은 것 때문에 입안이 터져 피맛이 나는 걸 다 상쇄시킬 만큼 키스를 잘 한다는 게 윤의 결론이었다. 두툼한 손이 뒤통수를 단단히 받치고 있어서 뒤로 고개를 뺄 수도 없었다. 아직은 키스에 익숙지 못한 윤이 으, 흐으, 하는 소리를 내며 화평의 어깨를 밀어내도 화평은 꿈쩍을 안 했다. 


문득 윤은 생각했다. 이 새낀 어디서 굴러먹다 왔길래 이렇게 키스를 잘하는 거야.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윤화평의 헤어진 전 여자친구들의 이름이 줄줄 떠올랐다. 혜지, 민경이, 나래, 다슬이... 최윤은 망설임 없이 발을 뻗어 윤화평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악, 씨발!”


“너는 진짜 개새끼야.”


정강이를 움켜쥐느라 숙여진 등을 윤이 팔꿈치로 한 번 더 콱 찍었다. 아아, 아! 최윤! 윤화평이 온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윤은 콘크리트 벽에 등을 대고 화평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다섯 대는 더 때려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던 화평이 허리를 들고 그런 윤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아 끌어 제 머리 위에다 톡 얹었다.


“… 뭐해?”


“이제 여기 위에서 놀게 해줄게. 내 머리 꼭대기에서.”


윤화평이 입꼬리를 한쪽만 끌어올려 씩 웃었다. 윤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머리 위에 놓인 손으로 화평의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꽉 잡았다가 악! 하는 소리에 힘을 풀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자, 나 힘들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윤의 뒤로 머리를 잔뜩 쥐어뜯긴 화평이 히, 웃으며 쪼르르 걸음을 옮겼다. 윤아, 어디 가? 우리 집? 아님 너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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