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수박화최

한겨울의 수박화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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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오의 진술

*WARNING 살인, 기묘함, 잔인함, 사망, 스톡홀름 신드롬


 오후 3시를 넘어가는 애매한 시각, 병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하얀 천장과 벽, 잿빛 바닥, 링거를 끄는 바퀴 소리. 숨을 들이켜자 지독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넘어선 지도 꽤 되었는데 병원 로비에는 커다란 트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가운데에 매달린 커다란 별 장식과 반짝거리는 꼬마전구까지. 그 외에도 이곳저곳에 연말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신년 축하와 연말 축하 문구가 함께 오가는 이상한 공간이다. 플라스틱 종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따금 어린아이들이 트리 옆으로 다가와 툭툭 플라스틱 가지를 두드렸고, 어른들은 접수처에서 진료 대기표를 뽑았다. 어디선가는 아기의 울음과 누군가의 다독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사는 로비를 지나 계단을 두어 개씩 밟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지친 간호사들과 접수대의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이었다. 아래층과 달리 복도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누구 하나 웃는 사람 없이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았다. 사람다운 인기척이라곤 업무를 보는 간호사들의 작은 농담과 간간이 문을 열고 나오는 보호자들의 대화, 그리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가는 환자 몇의 한숨뿐이었다. 활기를 빼앗긴 우울하고 나른한 세상이다.

 형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복도 구석에 있는 병실로 걸어갔다. 문 앞에 보이는 익숙한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긴장한 어깨에 힘을 풀었다. 남자는 벽에 상체를 기댄 체 팔을 무심히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푸석푸석한 얼굴과 온갖 피곤함이 가득한 눈가, 다림질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파란 체크무늬 난방과 검은 바지. 남자의 축 늘어진 입꼬리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깡! 그는 형사에게 반갑게 다가가다 그녀의 손에서 시선을 멈췄다.


“뭐야, 깡. 커피? 내꺼?”

“고 선배 꺼 아니에요.”

“내 꺼는?”


 남자는 실망 가득한 눈으로 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어색하게 바깥을 가리키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차 안에 있어요. 선배는 가서 좀 쉬어요. 여긴 내가 있을게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히죽히죽 웃으며 형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처럼 웃던 그는 알았어, 나 내려간다, 소리치며 아래층으로 뛰었다. 신이 난 어린 애처럼 계속 뒤를 돌아보는 남자의 모습이 퍽 우습다. 형사는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곤 병실 문을 열었다.

 그 좋다는 2인실이라지만 병실은 너무나 삭막하고 무거웠다. 온기 하나 없는 거친 공기, 한쪽에선 가습기가 흰 연기를 뿜고 있었고, 벽엔 병원의 로고가 박힌 시계가 째깍째깍 시끄럽게 울었다. 책상에는 낡은 성경 하나와 뱀처럼 꼬인 묵주, 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검은 가방과 함께 무어라 빽빽하게 적힌 서류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형사가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벌써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소리 없이 앉아있었다.

 신부는 긴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로만 칼라를 끼웠다. 검은 눈동자,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검은 구두, 오른 손목에 찬 검은 손목시계. 그와 다르게 피부는 로만 칼라만큼이나 하얗다. 가녀린 몸은 허공 어디에 걸린 것처럼 나른하게 흔들린다. 창백하고 푸석한 입술이 벌어지며 옅은 신음을 내뱉는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방문객을 올려다보았다. 신부의 눈동자는 빛을 머금지 못해 서늘하다. 형사는 입술을 깨물며 수첩 끝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적였다.


“몸은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이 아무런 문제 없대요. 이것저것 검사했는데 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며칠 더 있지. 고집은.”

“계속 신세를 질 순 없으니까요.”


 형사는 들고 온 커피 두 캔을 탁자에 나란히 두고 하나씩 뚜껑을 땄다. 오면서 많이 흔들렸는지 울컥 거품을 뿜는다. 그녀는 그중 덜 터진 것을 신부에게 건네고 제 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따뜻한 온기가 달곰한 음료와 함께 몸속을 파고든다. 신부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다 따라 조심스레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두 손으로 쥔 캔 커피의 끝이 작게 떨린다. 새파랗게 질린 손톱과 손등에 난 붉은 주삿바늘 자국. 형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물기 가득한 신부의 입술이 지친 미소를 짓는다.


“아직 완전히 퇴원한 게 아닌데 이런 거 줘도 괜찮나요?”

“마셔 놓고는. 따뜻한 거니까 괜찮겠지. 우리가 언제 그런 걸 따졌냐? 그리고 너 아무 문제 없다며. 거짓말이었냐?”


 참, 그랬죠. 신부는 다시 피식 웃었다. 하여튼. 형사는 쯧쯧 입소리를 내다 어깨를 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탁자에 놓인 신문이 눈에 박힌다. 표지 1면에는 한창 떠들썩했던 연쇄살인범의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실어놓았다. 범인에 대한 기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지금 제 앞에 있는 신부 이야기가 더 많았다. 연쇄살인범과 동행한 신부, 살인 행각을 모두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이자 방관자. 어린 시절 부모님이 형제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소년. 신부의 공범 유무부터 과거까지 죄다 까발리는 꼴이 퍽 반갑다. 형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신문을 쓰레기통 깊숙이 집어 던졌다. 개새끼들, 그녀는 누구를 향한 욕인지 알 수 없을 말을 내뱉은 후 환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한지 너무나도 평온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화가 나는지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씩씩댔다.


“이 병원만 오면 재수가 없더라. 네 가족이 죽고, 우리 엄마도 죽고, 이젠 너까지 미친놈한테 납치당하더니 이딴 취급이나 받고. 안 그러냐?”

“미안합니다.” 신부는 고개를 숙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망할, 형사는 입술을 삐죽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 니 잘못 아니야, 최윤. 네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사과하지 마.”


 그런가요,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사를 올려다보았다. 저 눈, 저 죽은 눈동자. 형사는 한 손으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란히 자리 잡은 둘은 입을 굳게 다물고 남은 커피만 들이켰다. 할 말이 많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남이었다면 안타까워하고 잊어버렸을 테지만, 그게 아니었다. 진짜 굿이라도 해야 하나. 형사는 빈 캔을 구겨 휴지통으로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캔이 안으로 추락한다.

최 신부는 그녀의 어머니가 구한 아이였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어린아이를 살렸다. 그는 형사에겐 어머니의 유품이자 그녀가 지켜야 할 유일한 사람인 셈이었다. 젠장, 젠장.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하필 연쇄살인범이 고른 사람이 최윤이었을까.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왜 우린 불행할까. 그리고 그녀는 신부를 옆에 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을 저주했다.


“윤화평 씨의 장례는 어떻게 되었나요.” 적막을 깬 최윤의 첫 마디였다.


 그의 이상한 질문에 형사는 눈만 깜빡였다. 무슨 의미일까, 잠시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대답을 찾다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답해줄 의무가 있었다. 형사는 손끝으로 이마를 긁었다.


“절차가 좀 까다로워. 피의자 신분이라 연고자 찾아서 시신 양도할 건지 물어보고 아니면 화장할 거다.”

“제가 윤화평 씨 데려가도 될까요.”


 말도 안 되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질문자는 잔잔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까지 쌓아왔던 사고와 경험이 무너진다. 신부는 진심이었다. 형사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행동을 멈춘 채로 제 앞을 바라보았다. 그저 침묵하며 눈을 깜빡인다. 최윤. 그녀는 신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리곤 자신의 수첩과 경찰 신분증을 탁자에 던진 후 환자를 바라보았다.


“최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은 형사가 아니라 강길영으로서 물어보는 거다.”

“네.”

“네가 납치된 날부터 돌아오기까지 2주가 걸렸어.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네가 진짜 보고 들은 것 말이다.”


 그녀의 말에 신부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꼼지락대며 캔 커피의 새카만 내부를 바라보았다. 기나긴 침묵 동안 형사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서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며 깊은 생각을 하던 신부는 곧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것을 깨닫고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모처럼 휴일이었습니다.”



*  *  *



 2주 전, 저는 시내에 있었습니다. 모처럼의 휴일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동안 할 일이 많아서 제대로 쉬지 못했던 터라 미뤘던 개인적인 일을 하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밖으로 내와 영화를 보고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휴일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정말 날씨가 좋았어요. 겨울이었지만 그날따라 따뜻했고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습니다. 생각해둔 일과는 간단했습니다. 저는 계획에 맞춰 영화를 보고 점심을 커피와 빵으로 간단하게 때운 뒤, 근처 가로수 길을 걸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 짙고 어두운 옷, 두꺼운 니트와 묵직한 발소리들, 시끌벅적한 생활 소음과 수다,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 저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근처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제가 좋아하던 화가의 전시회가 있었거든요. 그다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미술관 주변엔 사람이 적었습니다.

 저는 안내대에서 책자를 받은 후 전시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새하얀 벽과 고급스러운 잿빛 타일 바닥, 그 위로는 여러 작품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부터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까지 다양했습니다. 초콜릿을 아껴먹는 어린아이처럼 저는 설명을 꼼꼼히 읽으며 천천히 감상했습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3층 제1전시실. 저는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중앙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벅저벅, 사람이 없는 넓은 공간이라 발소리가 울렸습니다. 전 책자를 접어 옆구리에 끼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인기척이 없는 넓은 로비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유리창, 그 위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대리석 바닥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고요함 속에 저는 잠시 창문가로 가 몸을 기대었습니다. 몇 시쯤 되었을지 궁금해 저는 오른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습니다. 오후 3시를 조금 넘은 애매한 시각이더군요.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저는 한숨 돌릴 겸 멍하니 창문 밖을 응시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익숙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편하고 늘어진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어요. 그 사이로 형사님도 보였습니다.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가까운 곳에 소리가 나지 않는 경찰차와 청색 봉고차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왜 형사 한 명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이 안으로 들어올까. 저는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별일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기억나. 그때 우린 신고를 받고 긴급 출동을 했었어.”


 전 고개를 돌려 다시 복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느새 상황은 많이 바뀌어있었어요. 몇 없는 손님들은 아까 보았던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중앙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해 멀뚱히 서 있자 갈색 재킷을 입은 남자가 제게도 손을 흔들었습니다. 갈라진 입술이 저를 향해 꿈틀대며 외쳤습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대피하셔야 합니다. 저는 그의 말에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강 형사님과 함께 다니는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데엔 항상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저는 중앙 계단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전 제일 마지막에 서 있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을 다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저는 시선을 돌려 공간을 크게 둘러보았습니다. 하얀 벽, 뒤에서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회색 바닥, 나란히 줄지어 선 작품과 고요한 생활 울림. 그리고 제가 나왔던 제2전시실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전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형사님, 저는 그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 동그랗고 밝은 갈색 눈동자, 뺀질거리는 미소, 푸른빛이 도는 외투와 다부진 몸, 입꼬리가 올라간 능청스럽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는 그대로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습니다. 팔다리가 석고상처럼 단단해지고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습니다. 머리는 아찔할 정도로 새하얗게 변했고, 어디선가 멀리 파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심해에 빠진 것처럼 생각은 방향을 잃었고 시간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졌습니다.

 그 남자는 어느새 제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제 목에 작은 칼을 내밀며 낮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가까이 오면 이 신부의 목숨은 없어. 으르렁거리는 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습니다. 조심스럽게 뒤로 고개를 돌리자 옅은 비누 냄새와 남성용 스킨로션 향이 뇌를 녹였습니다. 저는 눈만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았고, 계단 아래에 있는 형사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동공과 그대로 멈춘 눈꺼풀, 새파랗게 질린 입술과 요동치듯 흔들리는 목걸이. 낯익은 형사 이름표. 저는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말했습니다. 괜찮을 거예요. 형사님, 제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하고 있어, 최윤.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어. 네가 윤화평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끌려간 것도, 널 태우고 사라진 검은 차도.” 형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떠올려도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다시 신부에게 눈을 돌렸다.

“이야기 계속해.” 그녀의 말에 신부는 대답 대신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제멋대로 갈라져 쇳소리를 냈지만, 누구보다 상냥했다.

“형사님, 윤화평 씨는 참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형사들이 무섭게 쫓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날 납치했다는 것뿐이었어요. 그는 형사들이 주춤거릴 동안 저를 데리고 미술관 옆 공원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직접 차 문을 열어주며 편하게 탈 수 있도록 몸을 부축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협박이나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올라탈 때까지 재촉 없이 기다리곤 손이 자꾸 미끄러지는 절 대신해 직접 벨트를 매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인사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었습니다.

 차는 곧 시내에서 벗어나 긴 고속도로 위를 달렸고 우릴 뒤쫓던 경찰은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따스한 햇볕과 아무도 없는 고요한 찻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어요. 하늘을 찌르는 높은 건물은 점점 무너져 넓은 밭으로 변하고 묵직한 산으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자동차의 규칙적인 엔진소리, 나긋한 진동, 찰락찰락 이따금 그의 목에 걸린 붉은 묵주 알이 흔들렸습니다. 이상하네, 저는 그의 얼굴과 몸을 훑어보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성당을 다니는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왜 묵주를 목에 걸고 있는 걸까. 불편하진 않을까. 이상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왜 날 데리고 있는 걸까. 우린 어디로 향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내뱉지 않고 목구멍 깊이 삼켰습니다. 실례일 것 같았거든요.

 세상이 완전한 침묵에 잠기자 그는 내비게이션을 켰습니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게 목적지를 입력하더군요. 전 알지 못하는 지역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와 함께 그곳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투박하고 굵은 손끝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거칠지만 잘 관리된 다정한 손가락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전 두 눈을 깜빡이며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손은 몇 번 허공에서 꼼지락꼼지락 춤을 추더니 또 다른 버튼을 눌렀습니다. 딸깍, 플라스틱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라디오가 들렸습니다.

 라디오에선 묵직한 화성 음악이 흘렀습니다. 고풍스러운 음악에 저는 피식 미소를 터뜨렸습니다. 그의 장난스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취향에 그냥 웃음이 나오더군요. 저의 입소리에 그는 굳은 얼굴을 부드럽게 풀며 옆에 앉은 저와 유리창 너머의 길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이야, 배짱도 좋으셔. 그의 다정하고 능글맞은 목소리에 저는 바짝 긴장한 몸을 느슨하게 풀었습니다. 선곡이 그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요. 저는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분리해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습니다.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알면 안 됩니까?


 창문 밖 풍경은 도시에서 비닐하우스가 펼쳐진 논밭으로, 다시 아파트가 보이는 도심지에서 나무가 우거진 산으로 바뀌었습니다. 화성 음악이 흐르던 라디오에선 이름 모를 여성 진행자가 여러 곡과 음악가의 일생에 대해 설명을 하더군요. 그녀가 말하는 예술가 중 몇 명은 제가 아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따금 라디오 음악 박자에 맞춰 자동차 핸들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선율을 흥얼거리던 입술은 한쪽 꼬리를 하늘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의 두 눈동자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날 향해 있었습니다.


괜찮아. 난 신부님은 건드릴 생각 없어.

제가 신부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신기가 있거든.


 거짓말,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전 다시 피식 미소를 내뱉었습니다. 최윤 마태오 신부님, 맞지? 다정한 그의 물음에 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는 잠시 입술을 씰룩이며 침묵하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실속 없는 농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윤화평이며, 저와 동갑인 것과 같은 계양진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날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몰랐던 소문부터 세상이 떠벌린 가십거리, 가족과 제가 알지 못했던 형의 마지막 모습. 그는 말을 마치곤 제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 마치 그의 말에 동의하듯 묵주가 잘그락거리며 요란스럽게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가족이 죽었던 그 날 이후로 듣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들, 그리고 새로 생긴 것과 사라진 것, 바뀐 다양한 것까지. 그는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세상 곳곳을 내려다보는 절대신처럼 많은 이야기를 특유의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떠들었습니다. 글쎄, 아니, 그러게, 세상에. 그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항상 홀로 있었던 제겐 참 신기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왜 쫓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다정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도주하는 동안에도 그는 제가 지루하지 않도록 친구처럼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전 그의 수다에 맞춰주기 위해 있는 힘껏 네, 네 반복해서 대답했고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습니다.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숨어 살아야 했던 저와 다르게 그는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입술을 굳게 잠그고 침묵하던 저와 달리 커다란 가면을 쓰고 세상을 누볐습니다. 그 어떤 법과 시선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는 마치 절대자요, 신이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전 자다 깨길 반복했습니다.”


 우린 긴 여행을 잠시 멈추고 근처 고속도로 휴게실로 향했습니다. 어둑어둑 해가 진 세상은 가로등과 간판 불빛, 그리고 건물 안의 형광등 아래에만 의지해 주변을 밝혔습니다. 인기척이 있는 곳을 제외하곤 모두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습니다. 그는 주차장 맨 구석 자리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습니다. 어떻게 하려는 걸까, 초점 없이 그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어깨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먼 길 가야 할 텐데 잠시 쉬어야지. 나가자. 그의 이끌림에 저는 아무 말 없이 홀린 듯 차 문을 열고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날 납치했으면서도 제가 무엇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자유롭게 두었습니다.


제가 도망가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럴 생각 없잖아.


 늦은 저녁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커다란 화물차를 모는 남자들과 아이를 데리고 온 여행객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몇 번 휴게소를 들린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느긋하고 평화롭게 구경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지갑을 꺼내 들며 제게 이것저것 간식을 가리켰습니다. 신부님, 이거 먹어본 적 있어? 그의 물음이 저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감자와 호두과자, 그리고 그 외 여러 포장된 튀김과 어묵을 사 들고 안에 구비되어있는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것이 생소했습니다. 저는 주문대 위에 적힌 간판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는 제 곁에 서서 적힌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르겠다고 말하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똑같은 명칭의 음식을 두 개 주문했습니다. 그가 계산하자, 안내 데스크에 있던 여성은 우리에게 각자 프린트된 숫자가 적힌 영수증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그는 받자마자 곧바로 제 손목을 잡고 앞에 놓인 식탁 중 가장 바깥 구석 자리로 향했습니다. 익숙하게 자리 잡아 앉으며 그는 제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구경하고 와. 자리는 내가 지키고 있을게.


 그의 말에 저는 그와 맞은편 자리에 서서 가지고 있던 물건을 테이블에 쏟아냈습니다. 배터리가 분리되어 전원이 꺼진 검은색 휴대폰과 묵주, 그리고 미술관 티켓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시야에서 제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전 그의 시선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휴게소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느리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음식점 옆에 붙은 편의점과 불 꺼진 커피 전문점. 저는 먼저 편의점에 들러 제법 용량이 많은 커피 캔 두 개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가 오래 운전하려면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요. 그리고 작은 생수 하나를 골라와 함께 계산했습니다. 품에 물건을 안고 편의점을 나와 쭉 앞으로 걷자 화장실과 갖가지 기념품을 파는 곳이 보였습니다. 점박이 대리석 계단 앞에는 트로트 CD를 파는 트럭이 있었고, 그 옆으로 아까 본 휴게소 간식을 파는 곳이 쭉 이어져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바라보자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연기를 모락모락 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오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밀려드는 공포와 사람들의 시선, 어디선가 쑥덕거리는 무서운 소리. 그날 이후로 날 지독히 괴롭히던 목소리들이 들렸습니다. 저는 이를 악물며 자리를 피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다리가 굳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곳, 그 순간의 전 신부도 아니었고, 그냥 가족을 죽인 살인범의 동생이었으니까요. 절 보호해줄 로만 칼라는 없었습니다.


윤화평 씨, 윤화평 씨.


그 순간 떠오른 이름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크게 부르지도 못하고 중얼중얼 입속에서 그 이름을 외쳤습니다. 살려주세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며 최대한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온몸에 힘을 주며 걸음을 뗄 때쯤 누군가가 제 어깨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전 그 손을 알고 있었습니다. 윤 화평. 저는 곧바로 뒤돌아서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제 손목을 잡았습니다. 주문한 거 나온 지가 언젠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다 식겠다, 마태오. 그는 제가 가득 안고 있던 커피 캔 두 개와 생수를 한쪽 팔로 와르르 감싸 쥐며 절 잡아끌었습니다.


“최윤, 왜 도망가지 않았어?” 형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다그침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목소리다. 그녀의 질문에 그는 잠시 턱 근육을 꿈질대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들, 누가 날 도와주겠어요. 저는 가족을 죽인 살인범의 동생이잖아요. 차라리 윤화평 씨의 곁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안했어요.” 최 신부는 반쯤 눈꺼풀을 내리깔며 자조적인 웃음을 내쉬었다.



*  *  *



 최 신부가 퇴원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한 신부는 그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쉬는 순간 없이 바로 성당 업무에 복귀했다고 전했다. 그 흉 지고 말라비틀어진 몸이 꾸역꾸역 생에 매달리고 있단다. 고통은 가장 효과 좋은 진통제라더니, 마태오 신부는 그 말대로 마치 고통을 고통으로 잊는 사람처럼 스스로 창틀에 매달렸다. 그녀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앙상한 손을 붙잡고 버티는 것이었다. 아래로 떨어지지 마. 죽지 마, 제발. 강 형사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를 탓할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았으니 안전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제 동생을 흙구덩이에 빠뜨린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거칠게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렌지빛 하늘은 눈 깜빡할 사이에 새카맣게 물들었고, 거리에는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어느새 한산해진 도로가 이상하게 소름 끼친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갈색 점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빌어먹을 날씨는 언제 또 추워졌는지. 그녀는 후후 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씩씩대는 숨소리와 함께 입김이 허공에서 스르륵 모습을 감춘다.

 길가에 우뚝 선 그녀는 성당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산책하는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스쳐 지나간다. 형사는 말없이 건물을 눈으로 훑었다. 연말과 연초를 맞이해 바쁘다더니 정말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다. 조용한 성당은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고요하다. 이젠 이곳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신을 믿지 않는 그녀이지만 최 신부와 만난 이후로 들락날락한 탓일까. 기분 나쁜 낯익음에 그녀는 쯧, 혀를 차며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에 단축 번호를 길게 누르자 몇 번 단조로운 신호음이 울리다 뚝 끊긴다.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예배실에 있어요, 짧은 말만 남기고 끊어진 통화지만 그녀는 화내거나 성질부리지 않았다. 형사는 주변을 몇 번 두리번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발걸음을 옮겼다.


“바쁜 일 없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텅 빈 곳을 웅웅 울렸다. 불이 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한눈에 최 신부를 찾을 수 있었다. 의자 등받이 위로 꼼질꼼질 움직이던 머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신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꾸벅 고개를 숙이던 그는 몸을 휘청거리다 의자를 붙잡고 섰다. 바짝 쥔 탓에 하얀 손가락이 날을 세운다. 정말 괜찮은 게 맞는 건지. 여전히 산송장처럼 차가운 얼굴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크게 없어요. 한 신부님이 신경 많이 써주시고 계세요.”

“다행이네.” 형사는 신부의 어깨를 슬며시 누르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제자리에 조심스럽게 주저앉는다. 그녀는 그가 앉은 곳의 옆자리에 나란히 자리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 계속 있어도 괜찮아?”

“지금 이 시각에 사람이 없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이야기를 마저 들으러 온 거잖아요.”


 예배실은 그 흔한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빛이 없어도 보이는 한쪽 벽면에 박힌 커다란 십자가와 그 뒤를 개미 떼처럼 줄지어 늘어선 의자. 그리고 그 어디쯤 똬리를 틀고 자리 잡은 사람 둘. 형사는 제 앞을 노려보다 신부의 말에 어색하게 턱을 긁었다. 보기 드물게 미안해하는 표정이 퍽 우습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흘깃흘깃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여전히 가지런한 모습과 새카만 사제복, 그리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신부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며 손장난을 쳤다. 하얗고 긴 것들이 묵주와 함께 서로 얽히며 꾸물꾸물 근육을 움직인다. 가녀린 손가락 위로 손목을 감싼 검은 손목시계와 깔끔한 소매가 눈에 들어온다. 형사는 멍하니 그 끝을 바라보다 등을 의자 깊숙이 기대었다. 이질적인 기분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곧 끼이익 의자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얼굴이 펴졌다.


“그래,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깊은숨과 함께 형사의 가슴팍이 부풀었다. 신부는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것은 처음뿐이었습니다.



*  *  *



 그가 왜 사람을 죽이는지, 어떤 기준으로 그런 범행을 저지르고 피해자를 물색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에게 확실한 명분과 목표가 있었고, 그 외의 다른 사람에겐 누구보다 친절했다는 거였어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할 일을 했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방식은 단순했습니다. 우린 퇴근 시간을 조금 넘긴 어둑한 밤, 항상 각기 다른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차를 대고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보조석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깜빡이는 가로등, 그리고 여기저기 보이는 가게 간판을 구경했습니다. 가끔은 아파트의 층수를 세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퇴근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늙은 부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젊은 학생, 라디오 진행자가 읽어주는 사연과 제가 알지 못하는 유행 노래들. 저는 그와 나란히 따뜻한 캔 커피를 마시며 이름 모를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전 기약 없는 기다림에 숨을 죽이며 눈을 깜빡였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어깨를 웅크리면 그 사람은 피식 웃으며 제게 외투를 덮어주었습니다. 신부님, 아프면 큰일 나. 전 말 없이 몸 구석구석을 감싸는 다정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갈라지고 튼 뭉툭한 손가락과 두꺼운 손바닥,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날이 선 칼 하나. 표면 위로 비치는 제 얼굴은 석고상처럼 새하얗게 굳어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항상 화평 씨는 금방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럼 전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절대 떠선 안 돼, 절대 봐선 안 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마구잡이로 거칠게 저항하는 옷깃과 억누르는 손, 터지는 신음과 함께 들리는 살을 찢는 소리. 몸이 서로 부딪치고 틀어 막힌 입술 사이로는 비명이 터졌습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목소리가 들리면 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몸을 더욱 웅크렸습니다. 공포에 떨리는 외침은 곧 헐떡이는 숨으로 바뀌었습니다. 가죽 시트가 손톱에 긁히는 소리가 차 안을 울렸고 그럴 때마다 곧바로 둔탁한 무언가가 마찰하는 음이 들렸습니다. 그 끔찍한 것 사이로 그 사람의 광기에 찬 숨소리가 선명히 들렸습니다. 절 바라볼 때와 전혀 다른 목소리였습니다. 어느새 소리가 커진 라디오는 강박적으로 하하하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형사님, 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가 왜 사람을 죽이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지 못했어요.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덜덜 떨며 신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발버둥을 치던 요란한 생의 집착이 사라지면 전 눈을 뜨고 거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뇌에 스며드는 짙은 피 냄새와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붉게 물든 그의 손가락과 살점이 뚝뚝 흐르는 칼, 아래에 힘없이 늘어진 시체 한 구, 그리고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였습니다. 형사님, 전 그 허망한 눈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계양진에서, 침대 밑에 숨었던 그 날, 형 최상현 신부가 절 보았을 때 마주한 눈동자였습니다. 피에 젖은 옷과 손가락, 그리고 제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죽은 형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형은 더듬더듬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칼을 바닥에 던졌습니다. 툭, 발판 카펫 위로 떨어진 칼을 빤히 바라보던 형은 곧바로 차 문을 닫고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제가 있는 조수석 차 문을 열었습니다. 차갑고 섬뜩한 공기와 함께 비릿한 향이 날 붙잡아 묶었습니다. 난 그 문고리를 잡고 침입을 막으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고장 난 기계처럼 그저 멍하니 그를 응시했고, 그는 피식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전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서 고해하듯 잘못을 빌었습니다. 형, 미안해. 난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못 들었어. 애원과도 같은 나의 용서에 그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 제 눈을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습니다. 끈적거리는 핏물과 함께 따뜻한 손길이 살갗 위로 붉은 자국을 냈습니다.


괜찮아. 신부님 잘못이 아니야. 신부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나와 이마를 마주 대었습니다. 그리운 목소리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손길이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가던 몸은 점점 뜨겁게 열이 차올랐고 시야는 독한 감기에 걸린 마냥 흐리게 변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의식은 몽롱하게 변하고 몸은 축 늘어졌습니다. 저는 아득한 의식 속에서 굳은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주님. 저는 떨리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천천히 기도를 외었습니다. 목이 잠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쇳소리가 났지만 전 최대한 힘을 주어 말을 토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지만, 어쩌면 신을 향한 원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착한 우리 형, 다정한 우리 형, 전 그의 단 하나뿐인 공범이었습니다.


“우습게도 전 그날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한 마디, 그토록 제가 갈망하던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악몽도 꾸지 않았고, 그날로 돌아가지도 않았으며, 죄책감에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이마를 마주하고 제가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었습니다. 전 새파랗게 질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들을 위해 신을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습니다. 형사님, 사람이란 참 간사해요. 어느 순간부터 전 아무나 죽길 바랐고, 그가 제게 또다시 그 한마디를 해주길 원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점점 공포는 미칠 것 같은 희열과 죄악감으로 변했고, 전 그 사이에서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전 제가 점점 미쳐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이 찾아와 제 뺨과 목을 쓰다듬으며 그 말을 속삭였습니다.


“미안하다.” 형사의 말에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형사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냥 미안하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윤화평 씨와의 시간이 끔찍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최윤.” 형사가 놀란 눈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진심이었고 사실이었다.


 경찰은 생각보다 우릴 늦게 찾아냈습니다. 그와 동행한 지 2주가 지났을 때쯤, 우린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들렀습니다. 이제 우리 둘은 완벽하게 일을 분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필요한 물품을 고르고 사는 동안 그는 제가 신부로 있을 수 있게, 세상과 절 가로막는 벽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와 전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보잘것없는 대화를 하며 나란히 걸었습니다. 쇼핑한 물건들을 봉투에 담고 건물을 빠져나와 신호등의 파란 불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더는 절 신경 쓰지 않았고, 전 그들 틈에 서서 한 손에는 갈색 종이봉투를 든 채 보이지 않는 로만 칼라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는 옆에서 제 손목을 맞잡고 이것저것 농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전 그의 실없는 소리에 핀잔을 주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는 그에 또다시 무어라 틱틱 조잘거렸습니다. 어? 문득 전 고개를 돌려 너머의 길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늘어난 테이프처럼 천천히 멈추고 소리는 주우욱 귀를 긁었습니다. 빠르게 째깍거리던 시곗바늘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 짙은 푸른색 점퍼를 입은 남자, 전 그가 형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순간 이유 모를 두려움에 저는 옆을 돌아보았습니다. 윤화평 씨, 나의 중얼거림에 그는 놓치지 않고 내 시선을 쫓아 같은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나와 다르게 더욱더 해맑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제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렸습니다.

 그는 절 조수석에 밀어 넣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전 그의 강압적인 행동에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항상 정당한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제가 왜 미안하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옷을 찢어 제 손목을 겹쳐 묶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는 안전띠를 당겨 제 허리 부근에서 몇 번 손을 움직였고, 곧 찰칵 경쾌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천천히 차 시동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웅웅거리며 급발진하는 엔진음이 들렸습니다. 그는 빠르게 차를 몰고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쁘지만 웃음이 섞인 숨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는 저의 불안한 신음, 그리고 와르를 무너지는 물건과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싸구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습니다.


“손에 느껴지는 따스한 감각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고속도로 진입을 알리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와 함께 귀가 멀 정도로 크게 틀린 라디오에선 오래된 팝송이 흘렀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고, 희미하게 사이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음과 잔잔하고 규칙적인 엔진 소리. 몸은 점점 두려움과 공포에 굳었고,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렸습니다.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윤화평 씨, 절 버리지 마세요. 갈라진 목소리가 잇새로 터졌습니다. 나의 외침에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없이 다정하게 웃었습니다.


신부님, 잠시 이쪽으로 와봐.


 전 그가 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상체를 내밀었습니다. 일자로 달리는 도로에서 우린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 전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더듬으며 뻗었고, 손바닥 가득 살갗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내 목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자신에게 끌어당겼습니다. 차는 흔들림 없이 달렸고, 그의 숨소리는 온몸을 타고 들어와 신경을 녹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에서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전 천천히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줄을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습니다. 모든 것이 멈추고 우린 죽음조차 초월한 것 같았어요.”


 서서히 느려지는 차 속도와 점점 딱딱하게 경직되는 혀, 불안했지만 그는 끝까지 절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고 따뜻한 손바닥은 아래로 툭 떨어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입속에 느껴지는 비릿한 맛과 사그라드는 온기에 저는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전 이 냄새와 감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옅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차 속에서, 저는 그를 찾아 허공을 더듬었습니다. 항상 어디에 있든 힘들 때마다 절 찾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저는 살을 찢어내듯 눈을 가린 천을 비틀어 풀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찌르는 햇빛과 검은 핸들을 붙잡은 손. 저는 그 끝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쭉 뻗은 팔과 작게 경련하며 찡그린 얼굴, 그리고 아래로 새빨간 물감이 번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새빨간 핏물에 저는 그의 가슴팍을 움켜쥐었습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이 제 손가락 주름을 타고 아래로 흘렀습니다. 안 돼, 안 돼. 전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그저 흘러나오는 피를 몸 안으로 집어넣으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곰 인형에 숨을 넣어 부풀리듯, 전 그의 피를 최대한 입안에 머금고 그와 입술을 마주했습니다. 윤화평 씨, 저의 필사적인 부름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완전히 멈춘 차 안에서 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죽으면 안 되는데. 전 또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발,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무의식적으로 전 왼손을 들어 살갗에 이를 박아 넣었습니다. 지독한 아픔과 함께 입안에 생살이 씹히고 뜨끈한 피가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벌리고 피를 흘려 넣었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숨은 말랑한 혀와 함께 피부에 닿았다가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전 아찔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어지러움을 느꼈고 곧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뚝뚝 끊어지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습니다. 마치 새카만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웅웅 진동했습니다.


“이게 다예요.”



*  *  *



 그 뒤는 모두 형사님이 알고 있는 이야기예요. 최 신부는 말을 마치며 형태만 있는 십자가를 곧게 응시했다. 깜빡이는 눈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는 일이 일어나기 전과 똑같은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차분한 머리칼,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사제복, 새하얀 로만 칼라와 그림자가 진 정적인 얼굴, 메마른 눈동자와 부드러운 피부, 차분한 목소리. 모든 것은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조용한 성당도, 세상 시끄럽게 떠들던 TV 뉴스도, 짜증 나게 굴었던 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말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공기가 폐에 스며든다. 이때까지 있었던 일은 꿈이라고 속삭이는 듯 신부는 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괜히 걱정한 것이 아닐까. 괜히.

 문득 그녀는 눈을 돌려 신부의 가녀린 손목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다리 위에 몸을 겹치고 축 늘어진 손목에는 여러 줄 그어진 가느다란 흉터와 검은 시계가 있었다. 검은 것 아래에는 선명한 이빨 자국과 아직 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었다. 항상 오른쪽의 희미한 흉터를 가렸던 시계는 이제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저 한 가지가 달랐다. 묘한 이질감과 불안이 스멀스멀 생각을 좀먹는다. 형사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신부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야, 최윤, 너.”


 그의 몸은 뭔가에 쫓기듯 헐떡였고 팔과 다리는 미칠 듯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놀란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한 그는 홀린 듯 부름에 답했다. 고장이 난 카세트처럼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와르르 무너진 목소리가 낮게 공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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