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하네.”
야…, 너 아주 염병을 한다 염병을?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시계를 본 최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 앞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익숙하게 재떨이에 털어 넣던 최 윤의 손이 무거운 이불을 확 걷어낸다. 놀란 화평은 다시 후다닥 이불을 끌어와 제 몸을 가렸다. 뭐야 갑자기….
여밀 생각도 없는 최 윤의 가운은 떡 벌어져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슬리퍼를 발에 끼느라 흰 정강이가 구부렸다 펴진다. 그에 맞춰 화평의 눈 두개도 못 볼걸 본 것처럼 감았다 떠졌다. 최 윤 쟤는 진짜 부끄러움도 없나봐….
청청한 대낮에도 불만 끄면 밤으로 변하는 게 모텔방이 하는 일인데, 최 윤은 여덟 시도 되기 전 일어나 부지런을 떨었다. 여기가 제 집인 듯 창문 열어 환기하고 샤워하고 다시 침대에 앉더니, 연거푸 하는 일은 담배 피우기다.
분주한 기운에 억지로 눈을 뜬 화평이 여러 번 기함했지만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차로는 뭐야 뭐야 요란을 떨고, 주변을 둘러보곤 우리 뭐 한거야? 내 팬티 왜 저기 있어? 설마, 잔거야? 내가? 너랑? 설명 좀 해봐. 최윤 너 나 안보이냐? 야! 야! 하고 모터 단 입이 쉬지 않는다.
“지랄 그만 떨고 일어나. 퇴실 안 해?”
안 할 거면 나 혼자 간다. 니 팬티는 니가 주워라. 구겨진 곳도 없어 보이는 코트를 정성스레 한참을 털고, 옷의 모든 솔기를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쓸어 낸 최 윤은 마지막으로 제 바지의 먼지를 점검하고 가방까지 털어냈다. 화평은 자신의 말은 죄다 씹고선 열심히 털고 닦고 각을 만드는 윤을 멀거니 보다가, 계속 제 할 일만 함에 이제는 다소 불만스러워졌다.
깨끗하구먼 뭘 저리 털어대…. 중얼거리는 화평에 윤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공중에서 엇비켜간 눈 두 개에 화평은 그제야 지난 밤 섹스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이상하게 온몸이 편한 곳 하나 없고 속은 울렁대고, 얼굴은 부어 눈 뜨기도 천근만근인데. 마치 꼭 저렇게 옷 먼지 털어대듯 섹스했던 어제의 우리가, 정말 너랑 나라고?
홀로 짱구 굴려 도달한 결론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어딘가 쭈뼛서는 느낌에 화평은 괜히 뒷머리를 만지작댔다.
실내는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찬바람에 썰렁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워. 피우질 말던가 무슨 모텔에서 환기를 한다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윤을 보던 화평이 더벅진 제 머리를 긁어냈다.
간밤의 피로감은 모두 지워내고 말끔한 얼굴로 나갈 채비를 마친 윤은 마치 새로 찍어낸 공산품 같았다. ‘어쩌구저쩌구 댄디맨 1호’정도 이름 붙어 나올 모형같은. 이불 아래서 눈만 빼꼼 내놓은 채 화평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뒤돌아…. 나 팬티 좀 줍게….
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돌아서 문고리를 잡았다. 야, 나 혼자 두고 어디가! 꼬인 스텝에 이마부터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화평의 외마디 비명을 들으며 윤은 모텔 복도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마는 무슨 꼬라지? 그새 누구랑 싸우고 왔냐?”
모텔 근처 우동집으로 들어오는 화평을 보고 한번 웃어버린 윤이 묻지도 않고 온우동 하나와 냉모밀 하나를 주문했다. 화평은 오늘만은 나도 따뜻한 거 먹고싶다고 말할 새도 없어서, 그냥 뻘하니 부은 이마만 문질렀다.
직원이 우동을 테이블에 놓자마자 윤은 그릇을 양 손에 잡고 멀건 국물을 3초쯤 숨도 안 쉬고 들이마시더니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는 동작으로 탁 내려놓고, 튄 국물에 화평이 얼굴을 닦아낼 때 쯤 찬 물 세 컵을 연속으로 마셨다.
와…무슨 청소긴가. 화평은 매번 이런 최 윤을 볼 때마다 놀라면서도 오늘도 또 놀라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긴 대로 안 사는 건 참 최 윤 따라갈 놈이 없을거다. 화평은 윤을 처음 보았던 때를 제외하곤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최 윤의 새초롬한 얼굴만 보고 혼자 망상하며 히죽 웃어본 건 딱 한 번, 정말 처음 만난 그 날 뿐이었다. 아빠가 인사시킨 새엄마 옆에서, 저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큰 키로 화평을 내려다보며 인사를 씹던 그 때 말이다.
최 윤이 얼굴도 곱고 키도 크고, 심지어 공부도 잘하는데 이름까지 최 윤이어서, 그게 좋기만 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화평은 기회만 되면 윤의 약점을 잡으려 늘 시비거는 마음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야했다. 한 번도 제 편이 아닌 적 없던 아빠가 최 윤을 통해 상대적으로 제 자식이 모자란 구석이 많다는 걸 알아버린 탓에 그때부터 구박 아닌 구박도 받게 되고 용돈도 반으로 줄고, 그 나머지는 윤에게 가버렸으니 얄밉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간 공부하란 소리 한번 없이 건강하고 착하게만 자라다오 했으면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최 윤 때문에 너도 공부 좀 하라 잔소리 하고, 아빠와 새엄마는 그렇다 쳐도 십년을 함께한 진돗개 육광이마저 나보다는 굴러들어온 최 윤을 좋아하는 거 같고, 학교에 가도 최 윤은 외모로나 하는 양이나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음악 선생님도 4반에서는 윤화평이 제일 노래 잘한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최 윤을 보고 엄지척, 좋아하던 여자애도 알고 보니 최 윤을 좋아했다 차여서 울고 있고….
좋아하기도 전에 억울함이 먼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를 생각하면 또 그것밖에 생각 못하는 윤화평은, 그러니 최 윤을 어딘지 좀 재수가 없는, 옆방 사는 새엄마 아들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 윤은 자아분리를 참 편리하게 이용하는 사람이었는데, 화평은 그것이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만 사람답게 굴고, 그 외 에게는 제 못된 본성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이중인격이라 생각했다. 최 윤은 평소 조근조근 서울말을 구사하며 친절한 얼굴로 선생님과 여자들을 대하지만 화평은 그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사를 퍼붓는 최 윤을 제 앞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다. 뇌를 거치지 않고 뱉어버리는 남에 대한 무시와 조롱과 험담. 손톱을 깎으면서도 어딜 잘못 건드렸는지, 주구장창 시발…소리를 달고 사는 녀석이 최 윤인데, 그 찌푸린 얼굴만은 휘영청 뜬 고운 달 같은 게 문제였지만.
태어나기는 여기서 했으나 어릴 적 무슨 연유로 몇 년을 어디 저쪽 섬에서 살았다던데, 윤은 그래서 정말 짜증이 나거나 누군가에 대한 경멸감이 최고치를 찍으면 거센 억양으로 화평으로선 그 어원을 추측할 수도 없는 욕을 하고 담배를 피고, 그런 자신을 빤히 보고있는 화평에겐 별다른 변명도 없이 유유히 가버리곤 했다. 화평은 제게 겉 다르고 속다른 그런 모습들을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윤을 보며 확실히 저 새끼가 나를 우습게 보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내가 아빠 새엄마에게 말해도 괜찮나? 왜 저렇게 나한테 함부로 하는데? 서로 그다지 엮일 일 없는 이복형제라고 해도 무려 한 집에 같이 사는데, 저렇게까지 내게 대접을 안 할 이유는 뭔가 싶어 화평은 늘 혼자 툴툴댔다.
그러던 화평에게도 기회가 왔는데,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제 이복형제가 음악선생에게 안겨 키스하고 있는 걸 본 날이었다. 하도 놀라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거침없이 윤의 셔츠 속으로 선생의 손이 들어가는 걸 보며, 윤의 비밀을 하나 잡았다는 생각에 화평의 입꼬리가 비싯거렸다. 물론...부주의하지 못한 탓에 아까부터 음악실 뒷문 유리창으로 보이는 화평의 머리통을 윤이 이미 알아챘다는 건 모르고서.
살금살금 뒷걸음을 치다 신나서 복도를 내달리던 화평의 손목이 최 윤에게 잡힌 건 학교 건물 뒤 작은 공터에서였다.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같이 좀 웃자?”
갑자기 나타난 최 윤에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 한 화평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할 말을 찾는 사이, 그는 곧 고교 시절 중 가장 기막히고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윤이 잡고 있던 화평의 손목을 그대로 당겨 제 입술을 겹쳤으니까. 제지할 새도 없이 남의 쌩 타액 맛을 본 화평이 겨우 윤의 입술을 깨물어 피를 보고서야 키스는 끝났다. 사정없이 벽에 밀쳐진 화평의 사고회로가 먹통이 되었다.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건 알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거지 않나? 이 자식 뭐야 정말?
“시발… 이래서 같은 학교 가기 싫었는데.”
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을 뱉어냈다. 피 섞인 침이다. 분명 제가 물어버린 입 안 여린 살에서 난 거겠지. 화평은 조금 무서워져 땅만 보고 눈만 도롱 굴렸다.
“너 왜 이래…? 너 나…좋아해?”
웃기지도 않네. 꼴값을 떨어라. 비웃던 윤이 소매로 입가를 닦아냈다. 피로 얼룩진 소맷단을 보고 불안해진 건 윤이 아니라 화평이었다. 집에서 물어보면 저거 뭐라고 핑계대려고….
“어때. 별거 아니지? 당해보니까 그렇지?”
윤화평. 어때? 제 성질대로 밀쳐놓고 욕하던 아까와는 다른 사람처럼, 잘난 얼굴 백번 써가며 벙긋 웃는 윤의 진의를 알 수 없어 화평은 버벅거리기만 했다. 뭐 대답 들으려고 물어본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래. 그러니까 그것도 별거 아니야. 알았지? 별거 아니니까, 어디 가서 입 털 생각하지마라고.”
너 아까 음악이랑 나 봤잖아. 잊어버리던지, 잊을 자신 없으면 입 다물고 있는 거야. 언제 잡았는지도 모를 다시 잡힌 손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마른 녀석이 어디서 이런 힘은 나오는지 손아귀 힘은 보통이 아니어서 아프다 유난떨며 겨우 손을 빼낸 화평이 자꾸만 제 얼굴에 닿는 윤의 눈을 피했다. 피하면 피할수록 집요하게 맞춰오는 시선에 화평은 그냥 여기서 증발되었으면 하고 빌었다. 덜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해도 소용도 없고…. 그냥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최 윤 완전 또라이였어…. 입을 열면 그대로 심장이 튀어나올까봐 화평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래. 너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귀엽다니까. 제 볼을 툭툭 건드리며 속모를 소리까지 하던 윤이 벽 뒤로 사라지고 나서야 화평은 숨을 뱉고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후우, 후우….
“최윤 얘 완전체네, 싸가지에 또라이에….”
와, 최윤 이 새끼 취미생활도 엄청나네. 온갖 얌전한 척 하더니 네 비밀이 남자 후리는 거였어?
와, 최윤 진짜 대단하다….
와….
와….
그런데 지금 나 얘랑 정말 키스한 거야?
진짜? 진짜다. 내 첫 키스으…. 다리에 힘이 풀려 화평은 스륵 주저앉았다. 잡혔던 손목은 아직도 시큰거린다. 심장이 대체 왜 이리 나대는 거야. 또 고장이 났나 보다. 고장이 또 났네. 화평은 제게 있어서 이 일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튈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맥박은 미친 듯 뛰고 몸이 뜨겁고 손바닥에선 땀이 줄줄 새고. 머리도 고장난지 오랜데…. 아직 살날은 한참 남았는데 왜 자꾸 어딘가 고장만 나는지 화평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윤이 닿았던 제 입술을 만져보다 얼굴이 달아올라 괜히 벌떡 일어나 더러운 교복 바지를 털어냈었다.
“우리 진짜 그거 했어?”
“…입 닫아. 밥맛 떨어지게.”
“나 기억 안 난단 말야.”
“니 머리 속 관심없어.”
“야, 너 진짜!”
“뭐.”
“나…처음이란 말야.”
아니 그걸 뭐 그리 조심스럽게 말해? 갑자기 먹던 우동이 왜 이리 짤까, 누가 국물에 손이라도 씻었나. 자꾸 제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쏘삭대는 화평에 기분이 언짢아진 윤은 젓가락을 놓았다. 그 소리에 또 겁먹은 얼굴로, 윤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입술을 안으로 오므리고 화평은 메밀국수 한판을 잽싸게 빨아들였다.
“아니, 몰론 완전 처음은 아니고오…, 남자랑은 진짜 처음….”
그 말을 하려고 끊지도 않고 한 판을 다 먹었나. 윤은 시답잖은 소리엔 대답 않고 주머니에서 만원 한 장을 꺼내 식탁에 내려놓았다. 합쳐서 계산해. 약국 갈 거야.
“아니…저. 최 윤, 잠깐만.”
정말 급한 일 아니면 이름 안 부르는 걸 아는데. 윤은 가지 않고 순순히 화평을 내려다보았다. 왜.
“나 있잖아. 그러니까 잘…하냐? 잘했어? 그…게이 섹스라고 하는 거지 이런 걸? 이것도 잘 하냐고…아니 했냐고오….”
무슨 소리 하나 궁금해 했던 내가 바보다. 최 윤은 입을 열려다 닫아버리고 화평의 코끝으로 손을 가져갔다. 손톱 끝으로 붙은 김가루를 떼어내니 그새 화평은 얼음처럼 굳었다.
“언제 묻었…. 고마워.”
이러다 애 체하지 싶어 슬쩍 시선을 내린 윤이 웃음을 참았다. 진짜 얘는 관리 안하면 얼굴 훅 가는 건 순간이겠다. 윤은 화평이 들으면 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난리를 칠 만한 말을 삼키며 다시 웃었다. 얜 못 생겼는데 귀엽지. 그런데 그런 건 밤에나 봐야지. 불 끄고 침대에서나.
“…무식하게 크기만 존나 커서.”
그 말을 남기고 윤은 가게를 나가버렸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등을 쳐다보다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조금 늦게 알아챈 화평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이다. 에이 씨발! 그놈의 술! 아무리 취했다고 할 짓이 따로 있지 내가 대체! 이건 필시 저 자식이 무슨 수를 쓴 것이다, 내가 이런 짓을 좋다고 했을 리가 없다…. 씩씩대며 계산 하고 나와 약국 쪽으로 몸을 트는데, 윤이 우동집 앞에서 담배를 피다 기다렸다는 듯 화평을 향해 손짓한다.
“약국 간다며?”
갔다왔잖아. 윤은 턱 끝으로 반대편 약국을 가리켰다. 벌써? 뭐 샀는데. 혹시 두통약 없냐. 나 머리 아파 죽겠다. 화평이 뒷목을 두드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술 아직 안 깼는데 두통약 먹으면 죽어.”
윤은 담배를 비벼 끄고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민트 하나를 제 입에 넣고는 화평의 입에도 쑤셔 넣었다.
“엥, 그럼 약국엔 왜 갔어?”
다 떨어져서. 윤이 마침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지갑 안쪽에 하나, 외투 안에도 하나 집어넣는다. 반짝거리는 정사각의 작은 금색 비닐에 화평이 뜨악하는 얼굴이다. 정말 최 윤 저건 부끄러움이나 민망함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할까. 살면서 설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건 아니겠지….
화평은 윤의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콘돔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손수 제 것에도 씌워주고 스스로도 씌우던 그것이다. 휘발된 줄 알았던 기억이 켜진다. 손수 씌워주기만 했나. 손수 올라타서 설마 정말로 제 구멍에 살살 눌러 끼울 줄이야. 와아….
화평은 아찔해졌다. 조금만 더 생각났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무슨 추한 꼴을 보일지 모른다. 야, 너 왜 그래? 토할 것 같아? 하얗게 질린 화평의 얼굴을 본 윤이 어깨를 흔들어 대는 통에 너 때문에 더…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화평은 주먹으로 가슴을 쳐댔다.
“넌 술도 못하는 게 무슨 위스키를 먹는 다고 고집이더니….”
가자. 너도 집으로 갈 거지? 윤은 얼른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화평을 집어넣고 옆에 올라타 집주소를 댔다. 그런 최 윤에 화평은 집까지 가는 동안 앞좌석을 부여잡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간밤의 기억, 그럼에도 자꾸만 연타로 떠올라 면밀히 속을 까보이는 섹스의 잔상을 물리치려 머리를 흔드는 통에 그렇지 않아도 울렁대는 속이 무사하지 못했다.
한 집에, 그것도 옆방에 사는 동생이라 오히려 잘 된 건지 아닌 건지 화평은 아리까리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윤을 볼 때마다 드는 이상한 기분에 화평은 여러 번 고장이 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건 처음부터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최 윤의 낯짝을 보고 있다 보니 자신도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했어서였지….
그래도 그렇지 한 집 사는 형제 아니야 우리? 사람 가죽을 쓰고 이래도 되는 건가요, 제가 동생하고 일단 술 먹고 잤는데요 동생은 도통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나봐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막 되먹은 인간이 아니라서 그냥 있기엔 찝찝하고 괴롭고 또 어떤 날은 열도 받고요. 화평은 포털 사이트의 일명 모든 것이 다 있지만 믿건말건은 니 맘인 게시판에 글을 쓰고 지우길 백번 하다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최 윤은 몹시 멀쩡해 보이는 데 왜 나만 계속 그 생각으로 고민인가 싶어, 그 기억을 덮으려 딸이라도 잡자 싶었지만 이상하게 야동마저 내키지 않아서 관두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노트북은 실제로는 멀쩡했지만 기대수명을 다 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아 씨, 큰맘 먹고 산건데. 화평은 벌러덩 침대로 드러누웠다. 이상하게 세상 모든 일이 다 재미가 없어졌다. 맘먹고 산 비싼 옷도 옷장에 그대로 걸려있다. 소개팅하고 놀러 다니기 바빠야 하는데 이젠 나가기도 귀찮고, 한참 열중해서 중독인가 싶던 게임도 아예 손을 놔버렸고. 거기까지면 괜찮은데 이렇게 만사 의욕 없는 얼굴로 누워 핸드폰에 검색이라고 쳐 보는 게 게이, 게이섹스, 게이의 취향 이런 게 전부라니. 거기까지도 봐줄 수 있지만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벽에 귀를 대고 쫑긋, 제 앞에서는 절대 들려줄 일 없는 애교 섞여 높아진 최 윤의 목소리를 훔쳐들으며 내용을 궁금해하고. 아 그리고 또….
그렇게 바딱, 갑자기 서버린 제 아래를 달래주고는 허무해진 화평은 사람 진짜 이렇게 추접스럽게 굴어야 하나 싶어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마주보기로 마음먹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해보자며 고민을 시작했지만,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좋아해본 적은 처음이라 자꾸만 생각은 엉뚱한 길로 돌아간다.
화평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 윤의 태도였다. 술 먹고 시작한 섹스가 그렇게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이후 몇 번을 더, 놀랍게도 이제는 술 없이 멀쩡한 상태에서도 이루어졌다. 열 번이면 열 번 다 최 윤이 원하고 윤화평은 어버버버 끌려가는 식으로. 그러는 중에도 윤은 집에서 보는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재수없게 굴어서 처음에는 좀 짜증나고 말았던 것이 점점 복잡한 마음으로 번져 화평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넘으며 다가오는 최 윤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화평은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처박히기를 여러 번이었다. 윤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화평의 얼굴을 토옥 건드리며 말한다. 넌 못생겼는데, 멍청하고, 눈치도 없고.
화평은 그래도 묻지 못했다. 못생기고 띨하고 눈치도 없는데 대체 그럼 그런 놈이랑 이 짓은 왜 해? 이 상황이 왜 벌어지고 있는 거야? 더욱 환장할 일은 속으로만 물어봤는데도 최 윤은 꼭 제 속도 읽은 듯, 목소리를 내어 대답을 해준다는 거였다.
“넌 벗겨놓으면 곧잘 하니까.”
뭘 그런 눈으로 봐. 너 나 이러는 거 옛날 미자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 말을 할 때쯤이면 이미 온몸이 탈수된 듯 쫙 뻗어서 뒤처리고 샤워고 할 기운도 없이 화평은 모텔방 천장을 보고 앓는 소릴 냈고 윤은 줄담배를 신나게 빨고 있을 때였다. 섹스도 몇 번 하면 내성이 생기나? 아니다. 난 도저히 아니야. 그러면 못해? 그건 아닌데. 그럼 싫어? 아니 사실은 좋기도…. 샤워실로 들어간 윤에 휑하니 남은 화평은 이불을 끌어안고서 자기도 됐다가 최 윤도 됐다가 혼자 묻고 답해본다.
‘솔직히 잘한다고 해주니까 싫진 않잖아.’
‘응.’
‘그럼 어때. 나만 좋은 거야?’
‘아니. 나도 좋아.’
‘그렇지. 그럼 문제될 거 없네. 지금까지처럼 그냥 한 번씩 해.’
‘근데 그게 또 좀 싫어. 마음에 걸리는 게 있고….’
‘왜? 나랑 하는 섹스 좋다며.’
윤화평은 허공에 그리던 최 윤을 양손으로 휙휙 지워낸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정신도 아닌 채로 벗겨졌던 건데. 누군가의 뒤에 제 걸 넣는 것도 참 생소했지만 분명 내 걸 넣으면서도 기분만은 당하는 느낌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던 것도 생소했고…. 싫은 건 아니었다고 서로 분명히 인정했다. 그래서 2차, 3차, XX차가 있을 수 있었던 거고.
그럼 대체 ‘좀’ 싫은 부분이 뭘까. 살을 부대끼면서조차 그다지 친해진 것도 아닌데, 이제는 사정 후 옆에 누워 지금 사귀고 있는 제 남친 흉을 보는 거라던가, 끝나고 나면 왠지 뛰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쓰는 화평은 신경도 쓰지 않고 ‘너 그러고 보니 좀 휘었네?’ 하며 화평의 것을 무슨 찰흙 만지듯 주물럭대고 손가락으로 튕기며 실실 웃는 것도 그렇고, 다리 사이에서 오럴은 기깔나게 해주면서 화평이 분명 키스하려들면 은근슬쩍 얼굴 빼 버리는 것도…. 그리고 오늘, 정말 스스로가 들어도 얼빠지는 고백을 했지만 몹시 추하게 차인 것도.
“최 윤 너 나랑도 사겨.”
“……?”
지랄. 최 윤의 비밀스런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갈테지만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에 퓨즈가 나간 화평이 참지 못하고 거칠게 윤을 침대로 밀치며 입술을 들이댔다. 아, 짜증나게! 머리 정리 다 했는데! 힘으로는 화평이 세긴 해도 최 윤 역시 성인 남자라 쉽지 않다. 윤은 계속 억지로 키스하며 얼굴을 거의 잡아먹고 있는 화평에 저항하다 밀쳐낸다는 게 하필 목울대를 건드리는 바람에 캑, 화평의 죽는 소리를 들어야했다.
캑캑대는 소리에 조금 미안해진 윤이 생수를 건넸지만 화평은 받지 않았다. 윤은 거울을 보며 화평이 헝클어뜨린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재수없는 호모새끼.”
미처 다 진정되지 않은 화평의 목소리가 윤의 귀에도 들렸다. 거울 속의 얼굴은 한번 씨익 웃고 말뿐.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나랑은 왜 안 사겨.”
“야. 넌 호모새끼 재수 없다면서 모순이 아주 쩐다?”
화평은 문득 궁금해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흡족하게 보고 있는 최 윤이, 고개를 돌려 보는 내 모습은 과연 어떨지. 모순이라고? 저야말로 온통 가식 빼고 남는 것도 없으면서.
“누가 호모새끼랑 사귄대? 너랑 사귄다고.”
“너 멍청한 건 알지만 말 참 안 통하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가온 윤이 화평의 머리 옆에서 까딱까딱 손가락을 돌렸다. 그만해. 장난 하는 거 아니야. 화평은 빙빙 도는 윤의 손을 확 잡아채 내렸다.
“그냥 너, 너랑 사귀고 싶다고. 최 윤.”
“싫은데.”
“왜?”
“일단은 내가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
뭐래…. 몰랐던 내용은 아니지만 그걸 최 윤의 입에서, 안 되는 이유라고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평은 웃지 않았다. 또라이에는 또라이같이 굴어야 뭐라도 얻을 수 있을거다, 이미 어떻게 해도 깔끔하게 좋은 것만 보고 갈 수는 없는 게 우리 사이니까.
“무슨 상관이야. 너 어차피 또 금방 그만둘 거잖아. 니 생일 지나고 나면 헤어질 거라며. 그럼 이제 나랑 사겨. 어차피 계속 이렇게, 나랑 잘 거잖아.”
요것 봐라? 잠자코 화평의 말을 듣고 있던 윤의 눈이 가늘어진다. 뭐라고 더 지껄이는지 들어볼 요량으로 차분히 담배 한 개비를 집어들고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하나를 다 피울동안 화평은 눈을 똑바로 뜨고 윤을 바라보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눈싸움으로 뭘 하자고.
“어울리지도 않게 진지 빨고 있어.”
윤이 다리를 들어 발로 화평의 배 아래 이불로 가려진 부위를 툭 쳤다. 이거 말고 얻을 게 뭐 있을까. 난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는데. 그래서 윤은 고개를 저었다. 윤화평, 밥이나 먹으러 가게 옷 입어.
“나랑 사귀는 건 안 되는 거,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봐.”
“없어.”
“거봐, 이유도 없잖아. 그러면서 무조건 안 한다는 거지. 시간 줄 게 생각해….”
“아니. 없다니까.”
“그러니까 생각해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댈 이유도 없는 거야.”
야. 싫고 좋은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이건 아예 없는 경우니까. 너랑 사귀는 것은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다니까. 호와 불호 자체가 없다고. 이게 그런 거야. 멀지 않은 데로 휴가를 간다고 치자. 갈만한 데를 생각해보는데, 홍콩? 상해? 도쿄? 그런데 우리가 평양은 아예 고려를 안 하잖아? 아니 못하잖아. 애초에 배제되어 있는 데라고. 마치 그런 거라니까. 너랑 사귀는 것은 마치 여행지로 평양을 꼽아보는 그런거라고. 이해하냐?
화평은 속사포 같은 최 윤에 대꾸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기가 찼다. 말이나 못하면 망정이지, 제 논리로 사람 구슬리는 건 최 윤의 특기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살자. 왜, 싫어? 싫으면 말해. 너랑 안 잘 테니까. 일단 밥이나 좀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겠다.”
한번을 부드럽게 말해준 적이 없지. 유독 하얗고 매끄러운 윤의 얼굴이 화평의 곁을 비껴간다. 화평은 손을 뻗어보지만 이미 일어나 선 윤의 그림자만 잡을 뿐이다.
“갈 거면 조용히 가지?”
넌 친구도 없냐? 윤은 짜증을 내면서도 계속 화평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없기는, 이미 다 송별회는 했지. 이번 주 내내 위장 구멍 나는 줄 알았다.”
화평은 채워지는 술잔을 거침없이 비웠다. 지난주만 해도 덥수룩했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짧게 깎은 머리만이 남았다. 윤은 그 머리가 마치 제 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고는 움츠린다.
“보기만 해도 시리다.”
“그렇지? 그런데 막상 잘라버리니 시원하기도 해.”
야. 고기 2인분만 더 시키자. 화평은 젓가락을 비비며 윤의 허락을 구했다. 밥도 안 먹고 다니냐? 대체…. 못마땅하다는 듯 보던 윤이 지나는 직원에게 추가 주문을 했다. 넌 안 먹어? 난 손 안댈테니 너 실컷 먹어라. 고기 꼴도 한번 못 본 것처럼…천천히 좀 먹어.
“그럼, 최 윤이 쏘는 거 정말 흔치 않은데. 천천히 먹어야겠다.”
“갑자기 좀 웃기다? 언제 신청했는데.”
“학기 끝날 때 쯤 바로?”
윤은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한참 사귀자고 졸라대더니 내쳐지는 것에도 지쳤는지 화평이 입을 다물 때쯤이었고, 근래는 시험이며 과제로 바쁘다고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대면서 밖에서 만나자는 연락도 거절했던 때….
“안 받아준다고 이렇게 도망가냐?”
“누가 그렇대? 착각 마셔.”
화평은 한 움큼 쌈을 싸 넣고는 윤을 보고 쏘아준다. 그냥 학교도 다니기 귀찮고, 어차피 가야 하니까 갔다 오는 거지 뭐.
“너 짜증나.”
“왜. 귀찮은 혹 떼버려서 좋은 게 아니고?”
“너는 귀찮을 거리도 못 되거든?”
그랬냐. 헤헤. 화평은 머쓱하게 웃는다. 윤아, 최윤.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역시 말이 없는 윤을 화평이 지그시 불렀다. 표정도 없고 진지한 목소리에 괜히 눈을 마주하기가 불편함은 피차 마찬가지다. 먼저 계산 하고 나가는 윤을 위해 화평은 조금 기다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두 대나 피운 윤이 삼겹살 집을 나오는 화평에 발걸음을 뗐다.
조금 떨어져 걸어도 도착지는 같을 텐데. 윤은 오늘 계속 따라붙는 귀찮은 건지 불편한 건지 그냥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건지 모를 기분이 오래된 담배 연기만큼이나 매캐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굳이 뒤돌아 볼 필요도 없었는데, 혹시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항상 있던 녀석이 없어졌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기를 주저할 때였다. 윤은 제 팔이 뒤로 휙 잡아당겨지는 것에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가서 한잔만 더 하고, 그리고 나서 집에 가자. 칭얼대는 화평의 목소리였다.
- 윤아. 아직도 그 형 만나냐?
- 아니.
- 만나고 있을 줄 알았는데.
- 언제는 오래 못 간다고 악담을 하더니.
- 그럼 우리 이제 사귀면 안 되냐?
- …….
- 농담…농담. 재미없지? 미안. 취했나보다.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데, 나름 상쾌한데 오늘 왜 이리 빨리 취하는 것 같지?
- 군대 간다며 뭘 사귀어.
- 그럼 안 가면 사귀어 줄 거야?
- 아니.
- 아니면 다녀오고 나면 사귀어 줄 거야?
- 아니.
- 에잇, 뭐냐….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꼭 그래줄것마냥.
- 실없는 놈. 내일 입대하는 놈이 그건 왜 물어.
- 나도 몰라. 안 되는 거 아는데…또 돼도 그게 말이 안 되는데. 한 집에 살면서. 넌 왜 그러게 우리 집에 와가지고.
화평의 취한 얼굴이 물러 터져서 계속 웃고 별일 아닌데도 웃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곧 울겠네. 윤은 춥다고, 집에 가서 얘기하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집에서 할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아 잠자코 화평이 하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아저씨 안 만났으면 내가 너 만날 일도 없지.”
“그런가?”
“너는 그러게 욕심낼 걸 내.”
윤은 자신이 화평을 먼저 건드린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게 뭐 미안한 일이라고. 가족이라고 해도 생판 남일 뿐인데. 최 윤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런 제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취한 너를 왜 내가 끌어안고, 맨살을 붙여보고 싶었는지는 이유가 있긴 있었을 텐데, 이제는 시간이 지나서 기억나지 않지만….
“알아, 안 되는거. 그래도 꼭 될 것만 같더라? 최 윤 네 잠든 얼굴 보고 있으면.”
윤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렸다. 섹스가 뭐 대수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화평이 언제 잠든 자신의 얼굴을 보며 어떤 감정을 키웠는지,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 없어서.
“나 취했으니까 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더 한다. 듣고 잊어. 어차피 내일이면 하고 싶어도 못할 거고 용기도 안날거야. 나랑은 안 사귄다고 하니까 솔직히 억울하기도 했고, 그래서 장난처럼 나 좀 가져라, 가져라, 해댔지만 그거 진심 반 장난 반이다. 알고 있지?”
최 윤은 웃었다. 윤화평 너 같은 걸 가져서 어디다 써.
“장난치듯 그러기는 했는데…정말 끝까지 네가 안 가진다고 했었잖아. 나 진짜 그래서 서러워 뒤질 것 같아. 왜 그리도 그 말이 서럽던지, 지금도 서러워서….”
“윤화평 너 우냐? 울어?”
“아니!”
불쑥 높아진 화평의 목소리에 윤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안 운다니까! 에이씨…. 화평은 팔을 들어 제 얼굴을 닦아냈다. 따가워…. 찬바람에 헐어버린 코끝이 반들거린다. 윤은 보다못해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거 비싼건데. 받아. 드럽다. 그만 울고 좀 닦아라.
받아든 손수건과 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화평이 뭐에 눌렸는지 더 크게 울먹거리더니 얼굴을 손수건에 묻고 한참을 으아앙이다.
“아씨, 쪽팔려, 조용히 좀 해….”
울기로 작정한 사람이 남의 말이 들릴 리 없다. 한참을 들썩이더니 코까지 시원스럽게 풀고는 그걸 또 곱게 세 번 접고 이건 내가 가져가서 세탁해서 돌려줄게, 한다.
“다 울었냐? 왜 갑자기 울고 그래. 추하다.”
“서럽다고….”
“참 별게 다. 계속 서럽게 살아. 윤화평 넌 좀 그래도 돼.”
최 윤은 사실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화평의 얼굴을 감싸고 우는 눈을 닦아내고 차가워진 볼을 쓰다듬었다. 별 의미 없는 다정함 같은 건데. 안 그러면 이 자식 계속 서럽게 울 것 같아서. 원하지 않는데 쓸데없이 이목이 집중되는 건 윤이 질색하는 것 중 하나니까. 그것도 집 가까운 동네에서.
몇 초나 지났을까, 윤은 제 손이 시려워져 얼굴을 감싸던 걸 거두려는데, 그걸 또 무슨 의미로 착각하셨는지 화평은 윤의 손을 다시 끌어당겨 제 얼굴에 대고 부비고 입술로 가져가 쪽쪽댄다. 거기까지는 최 윤이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해도 되냐고 정식으로 묻는다 해도 허락할 건 아니었지만 이미 최 윤의 손은 화평의 눈물콧물침 범벅이 되어버렸고, 윤은 그만 쳐 울고 집에 좀 가자 며 입술을 깨물고 애써 화평을 도닥였다. 참을 인자 서른 개를 그리면서.
어흑, 으아앙! 잠겼던 수도꼭지가 다시 열렸다. 매달리듯 자신을 껴안은 채, 싫어 그런 거 싫어, 나 가져, 최 윤 너 쇼핑 좋아하잖아, 나 샀다고 생각해…!하고 떼쓰는 윤화평을, 이걸 확 밀어내 말어 하던 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떼어내기를 포기해버렸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라 치자. 따지고 보면 한 집 사는 너랑 나 보통 인연은 아니니까 이 정도는….
“야. 나는 원래 중고는 안 사.”
최 윤은 그렇게 말하고서 에라이 씨 될 대로 대라…윤화평 넌 그만 좀 울고, 내일 부은 얼굴로 입대할래? 하며 화평의 등을 아프게 퍽퍽 쳐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