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수박화최

한겨울의 수박화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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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으으-.

짧은 신음을 뱉은 윤은 꽃가위를 작업대 위에 툭 내려놓고는 찌뿌둥한 허리에 손을 대고 좌우로 한 번씩 꾸욱꾸욱 누르듯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한번 꾸욱 젖혔다가 몸을 바르게 세우고 각종 그린 조각과 꽃잎이 붙은 앞치마를 짧고 강하게 팡팡 쳐냈다.


“손부터 씻어야겠다.”


윤은 양손을 흘끔 내려다보곤 미지근한 물을 틀어 가만히 모은 양손을 물에 적셨다. 꽃과 나무들을 손질하느라 흙과 초록물이 든 손을 씻어내는 소리가 찰박찰박 울렸다.


“촬영용 부케가… 강길영님, 한시현님, 신미연님…”


손을 말끔히 씻어낸 윤은 작업대에 놓인 메모지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했다.


“윤호선님 생일 꽃다발 오케이, 박해영님 선물용 플라워바스켓 오케이.”


윤이 언제나 최종점검을 할 때 쓰는 진한 보라색의 얇은 마카펜. 윤은 그 마카펜으로 몇십장이 넘는 메모지에 체크표시를 해나가다 마지막 메모지까지 끝을 내고서야 음, 다 됐나. 더 없지?하고 작업대를 휘휘 둘러보고는 조금 피곤한 듯 눈썹을 으쓱했다.



윤이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땐, 주변 모두가 하나같이 윤을 말렸더랬다. 꽤나 능력 있는 개발자로 평가받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능력이 있으면 무엇하리, 윤은 영 직장생활은 성격에 맞지 않아 하루에도 열 번씩 퇴사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취미로 다니던 플라워클래스에서 재능을 발견하고는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서 가게를 낸지도 벌써 3년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꽃집 사장님이 남자라는 것에 생소해 하는 사람이 많더니, 윤 특유의 섬세한 터치와 감각적인 형태로 잡은 부케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부케의 얼굴뿐 아니라 뒷모습까지 신경 써서 잡아주는 습관 덕에, 어느 신부의 부케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면서 예비신부들 사이에서 핫한 플로리스트가 된 건 가게를 연 지 고작 1년 남짓 지났을 때였다. 물론 그 입소문에 거기 사장님이 그렇게 잘생겼다더라-,가 한몫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반년 전 천고도 높고 널찍한 독채로 이전도 했다. 잡지에도 몇 번 실렸고, 방송에서도 섭외가 들어왔는데 그건 윤이 어색해 거절했다. 이제는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만큼 잘나가는 플로리스트가 되었다.


씨엘드로브(Ciel de l'aube).


새벽하늘. 가게 이름을 정하는 데 꽤 오래 걸렸었다. 윤은 저 멀리서부터 푸르스름하게 빛이 드는 새벽하늘을 좋아했다. 가게를 내기 전에도 윤은 종종 새벽 꽃시장에 꽃을 사러 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보던 새벽하늘을 떠올리곤 그 길로 한참을 고민하던 가게 이름을 정했더랬다.

사장님이랑 진짜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에요. 어느 날 한 손님이 꽃다발을 받아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해준 말이었다. 차분하고, 약간 서늘하고... 그리고 무척 예쁜 것까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생긋 웃던 손님의 얼굴은 때때로 생각이 났다. 




윤은 더 이상 상품으로 판매하기 어렵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꽃들이 있으면 다듬어 주위에 나누어주곤 했다. 딱 알맞게 산 덕에 남는 꽃이 없을 때도 적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나누는 작은 선물 같은 것이니 건네는 날들이 불규칙해도 괜찮았으므로.


그렇게 꽃선물을 하는 날이면 윤은 양손이 모자랄 만큼 품 안 가득, 한 아름 꽃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윤에게 종종 모닝커피를 쥐여주는 길 건너편 카페의 최한결 사장님에게는 테이블 센터피스로 쓸 수 있는 작은 묶음을 여러 개.


“항상 고마워요. 오늘도 역시 예쁘다, 잘 쓸게요.”

“저야말로 모닝커피 잘 마시고 있어요.”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봐요, 최사장.”

“네, 최사장님도 좋은 저녁 되시구요.”


서로 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둘 사이 약간의 장난 같은 것.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윤이 종종 미사를 보러 가는 성당의 보좌신부님인 오수민 미카엘 형제님께는 사제관의 화병에 꽂아둘 수 있을 소담스러운 꽃다발로 한 개.


“매번 감사해서 어쩌죠?”

“항상 고생 많으시잖아요.”

“아이구 제가 또 뭘. 아무튼 감사해요, 마태오 형제님. 찬미예수-. 평온한 밤 되시길.”


손바닥을 마주대고 고개를 꾸벅.


성당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나오는 경찰서의 한태주 반장님은 민원실에 둘 수 있는 화사한 꽃다발을 때로는 한 개, 때로는 두 개.


“어, 저번에 주신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5월이잖아요. 웨딩 고객님들 많아서 많이 들였는데, 계산을 조금 잘못했더라고요.”

“저야 덕분에 감사하지만... 다음에 제가 먹을 거라도 한 번 드리러 갈게요.”

“에이, 괜찮아요. 동네 지켜주셔서 감사해서 드리는 건데요. 또 뵐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사장님. 조심해서 들어가요.”


마지막으로 윤이 사는 단지 바로 앞에서 떡볶이 노점을 하는 아주머니께는, 아주머니를 닮은 푸근한 꽃다발을 한 개.


“아유, 뭘 또 가져왔어. 하여튼 안 줘도 된대니까.”

“에이-. 좋으시면서.”

“으이구 받으면 좋기야 좋지만 아니 이러면 돈은 어떻게 번대.”

“저 돈 잘벌어요-.”

“아이고 어련하시겠어. 아니 근데 윤이씨는 연애는 안 해? 이런 꽃을 나 같은 아줌마한테 줄게 아니라 애인을 줘야지.”

“그러게 말이에요, 좋은 사람 있음 소개 좀 해주세요.”


윤이 여느 때처럼 생긋 웃으며 답하면, 아주머니는 또 아휴 우리 딸내미 시집보내면 딱 좋겠구만 우리 딸은 영 윤이씨가 아까워서 안 되겠네,하고 농을 건네신다.


“자, 가져가서 먹어.”

“어, 저 집에 가면 먹을 것 있어요!”

“에헤이-. 어른이 주면 냉큼 받는 거야. 얼른, 늙은이 팔 빠지겠다.”


윤이 꽃을 선물하는 날이면, 그렇게 마다를 해도 아주머니는 윤의 손에 꼭 떡볶이든 오뎅이든, 뭐라도 들려서 보내주셨다. 오늘은 빨간 떡볶이다. 매콤달달해서 윤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팔자눈썹이 되어 울상을 하면서도 아주머니가 흔들어 보이는 봉투를 건네받은 윤이 감사해요, 잘먹겠습니다-.하자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저으신다.



어느새 가벼워진 손으로 건네받은 떡볶이 봉투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며 집으로 향하는 길, 윤은 어디선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넘어오는 라일락 향기를 느꼈다. 진작 겨울은 다 지나고 봄이 한창이다, 싶었다. 노지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개나리도 어느새 다 지고, 장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라일락… 라일락 한창 필 계절이구나. 진짜 5월이다 싶네.”


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라일락 향기를 머금은 공기를 차분히 마시고서야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





“사장님, 라일락이랑 냉이꽃 메인으로 와이드부케 예약주문.”

“아, 이제 라일락 주문 들어오네요. 근데 라일락이랑 냉이꽃이요? 특이한 조합이네… 알겠어요. 세부사항 적어서 작업대에 놔주세요-.”


똑, 똑. 윤이 손질하던 장미줄기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곤 물기 어린 손을 탁탁 털어 작업대에 새로 올려진 메모지를 들었다.


“흠… 보라색 흰색 라일락을 섞어서, 그리고 냉이꽃… 다른 꽃은 가급적 섞지 말고… 와이드로. 큰 베이스에 꽂아둘 수 있을 만큼 풍성했으면 좋겠고…. 어, 금액 상한 없음? 실장님, 이게 뭐예요?”


금액 상한이 없다는 주문은 또 드문 일이다. 은방울꽃 부케처럼 그때그때 시가가 너무 차이가 나는 꽃이라 가격 상관없이 만들기만 해달라는 그런 주문도 아닌데, 상한이 없다니.

 

“어어, 그게요. 저도 세 번이나 확인했는데, 없대요. 아주 비싸도 좋으니 해달라고.”

“아니… 그래도 어느 정도 사이즈였으면 싶다는 것도 없었어요? 큰 베이스도 크기가 제각각인데.”

“뭐라더라.... 아, 사장님이 들었을 때 품 안을 가득 채울 정도면 된다고 그러던데요.”


이상한 주문이었다. 내 품 안에 가득이라… 윤은 과연 주문을 한 사람이 꽃집 사장이 키가 180이 넘는 장신의 남자라는 걸 알고 한 말인지, 아니면 여느 꽃집처럼 적당히 아담한 여성을 생각한 것일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정도 크기로 해야 하나. 윤은 곧 금액 상한이 없다 했으니 제 품을 기준으로 만들면 크게 문제가 없겠지하고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윤은 한참을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곰곰 부케의 형태를 머리로 그려보았다. 라일락과, 냉이.


“주문이 특이하네... 라일락이랑 냉이면 꽃얼굴 조합이 어떠려나. 다른 꽃이 안 되면, 그린 위주로 섞어야겠다.”


라일락만으로 중간 컨셉을 잡은 다음 냉이를 어떻게 어레인지할지 다시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윤은 메모지를 뒤집어 예약자명을 확인했다. 



윤화평 님.



윤은 그 이름을 보자마자 철렁,하고 심장이 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윤화평…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머리로, 마음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을 그린 이름인데, 글자로 보니 왜 이렇게 낯설까. 3년간 가게를 하면서도 한 번을 손님의 이름으로도 온 적 없었던 이름이다. 동명이인이 꽤나 있을 법도 한데, 3년 만에야 처음이다. 게다가 우연이 저에게 장난을 치기라도 하는 듯, 주문한 꽃도 라일락이다.

주문한 사람이 그 윤화평일리도 없는데, 이름만, 그 글자만 보아도 여전히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것이 윤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벌써 12년 전의 사람인데,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아직도.

 




-------





“최윤, 너는 어떻게 된 게 꽃이 이렇게 잘 어울리냐.”


원예부에서 정성 들여 가꾼 교정의 꽃밭 앞에 쭈그려 꽃을 구경하는 윤을 보고 화평이 말했다.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면, 꽃에 파묻혀 있는 듯도 했다.


“뭐야-. 그거 무슨 뜻이야.”

“칭찬이지. 예쁘다고. 누가 꽃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네.”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제 허리에 손을 감는 화평을 샐쭉 흘겨보며, 윤이 허리에 감겨온 그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아파 윤아.”

“아프라고 때린 거야.”

“아무튼 너는 나중에 꽃집 사장님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어. 매일 꽃에 둘러싸여 지내는 모습이 막 상상돼.”

“아니 이렇게 고생해서 공대 들어가서 꽃집을 하라고?”


화평의 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윤이 허,하고 웃었다. 저나 윤화평이나, 엔지니어가 되어보겠다고 밤 11시까지 야자 해가며 같이 공부하고, 학원 다니고, 그러고서 나더러는 꽃집이라니.


“할 수도 있지. 나중에 윤이 너는 꽃집 하면 좋겠다.”

“...왜?”

“나 퇴근하는 길에 매일 꽃 사이에 파묻힌 너 데리러 가면, 그냥 좋을 것 같아서.”

“하여튼 실없는 소리 하는덴 1등이지... 들어가자, 점심시간 끝났어.”


영락없이 구박하는 말투였지만 상상해보면 그 그림도 영 나쁘지는 않아, 윤은 푸스스 웃으며 제 교복 상의를 탁탁 털고 일어났다. 화평이 그런 윤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쭉 끌어내리는 바람에, 윤은 그대로 도로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 아퍼. 뭐야아-.”


쪽.


바닥에 쿵 하고 앉혀지느라 얼얼한 엉덩이를 만지던 윤의 입술에, 화평이 빠르게 쪽, 소리를 내며 짧게 키스했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급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조금 구석진 곳에 마련된 꽃밭 주변엔 다른 학생들의 인기척은 없었다.


“윤화평! 학교에서 이러면 어떡,”


조금 안심한 윤이 어휴,하고 한숨을 쉬고는 화평의 행동이 부주의했다는 말을 하려는데, 다시 입술이 막혀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조금 전보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진하게 부딪쳐오는 화평의 입술에, 윤은 화평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보았지만 소용은 없었다.

화평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씩 웃으며 최윤 충전하기.라며 입술을 뗐다. 화평의 입술이 윤의 입술에서 살며시 떨어질 때, 꽃밭 끝에 자리한 라일락 나무들이 어느새 개화했는지 라일락 향기가 훅 끼쳤다.



열아홉의 최윤, 열아홉의 윤화평. 그날의 키스에서는 라일락 향이 났다.








“윤아, 우리… 헤어지자.”

“......”

“미안해.”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주말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주말에 무슨 일이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더니, 갑자기 헤어지자는 화평이 윤은 퍽 당혹스러웠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 말을 했던 것이 고작 사흘 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째서?


“......왜?”

“나, 미국으로 가게 됐어.”

“미국? 고3이잖아. 이제 와서?”

“어… 그게, 그렇게 됐네.”


윤은 혼란스러웠다. 미국이라니. 지구 반대편, 12시간 시차가 나는 곳. 아니, 그렇다고 당장 헤어져야 할 이유가 되나. 방학 때도 들어올 테고 졸업하면…… 또 들어올 텐데.


“롱디... 그거 하면 되잖아. 한국 영영 안 올 것 아니잖아.”

“......미안.”

“화평아,”


윤이 손을 내밀어 화평의 팔을 잡으려는데, 윤의 손이 채 닿기 전 화평이 흠칫하며 몸을 뒤로 쓱 빼냈다. 윤은 화평의 행동에 가슴이 저릿저릿해졌다. 


나를, 피했다. 윤화평이, 내 손을 피했다.


“......미안해.”

“윤화평.”

“잘 지내고. 아프지… 말고.”

“.......”


화평은 마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입술을 꾹 물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윤은 멀어지는 화평을 다시 부르지 못하고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로 화평은 학교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화평이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했다더라, 인사 못 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란다.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윤은 멍했다. 들리는 이야기가 사실인가 싶은 기분이었다. 내일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사실 장난이었다며 화평이 뒤에서 윤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화평의 얼굴도 가물거릴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연락조차 한 번 오질 않았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서울바닥, 참 넓다 싶었다.






처음 1년, 윤은 매일 밤을 울었다. 

잊으려 더욱 공부에 집착적으로 군 덕에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울 정도로,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면 떠오르는 화평의 얼굴에 눈에서는 밸브가 고장이 나서 물을 잠그지 못하는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져댔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룽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고작 해외로 유학을 간다는 이유로 이별을 말한 사람이 무어가 좋다고 내도록 눈앞을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2년, 눈물이 바싹 말라버렸다. 

그 1년 동안 너무 많이 울어서였을까. 이번에는 어느 순간부터 수도가 끊긴 마냥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심장이 버석버석 마른 겨울의 운동장 흙바닥 같았다. 슬픈 영화를 보아도,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어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앞에 어룽거리는 화평의 낯은 여전했다.



윤은 매일을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3년.

윤의 감정의 수도꼭지가 그만하면 정상적이다 싶을 만큼 고쳐지기까지는 꼬박 3년이 걸렸다. 화평이 환영처럼 떠다니는 일도 잦아들었다. 가끔, 윤의 꿈에나 나타나 수도꼭지를 며칠 고장 내고 가곤 할 뿐이었다.


5년째가 되니, 이전처럼 이유 없이 고장이 나는 일은 사라졌다. 이제 괜찮은가보다. 그렇게 윤은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아마도 마음이 죽어버린 것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윤이 지난 12년간 다른 사람을 전혀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다가온 사람들은 많았고, 감정의 수도꼭지가 안정된 후부터는 그 중 몇몇과 데이트라 불릴 법한 것도 했으며, 3년 전까지만 해도 연인이라고 규정지을만한 관계에 발을 담그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와도 좋게 끝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죠, 윤이씨.”


3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은, 이별을 고하던 날 윤의 눈을 담담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대충 눈치는 챘는데… 윤이씨가 좋아서 그냥 괜찮겠거니 했는데, 아니네요.”

“......미안해요.”

“왜 미안해요. 윤이씨 마음 나한테 아직 없어도 우선 만나보자고 한 건 나였는데…. 내가 너무 자신만만했나봐.”

“그래도... 미안해요.”


그는 윤의 말에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을 이해한다는 끄덕임이었다.




그는 화평을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그도, 그 전의 사람도, 윤이 만났던 사람들은 다 어딘가 화평을 닮아있었다. 

화평과의 일을 아는 친구들은 윤의 이런 행동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제 그만 윤화평에게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또 윤화평을 닮은 사람이냐고 했다. 거 참 취향 한번 소나무네-,하고 농을 치고 마는 지인도 있었지만, 그 또한 결국 윤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윤은 그를 마지막으로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와 헤어진 즈음부터 다시 윤의 꿈에 화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에 지쳤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헤어지며 했던 말 때문이었을까…. 윤은 답을 알지 못한 채로 많은 날들을 젖은 베갯잇 위에서 눈을 떠야만 했다.




윤화평.

화평아. 너는 진작 떠났는데...

네 그림자는, 언제쯤 널 따라 나에게서 떠나가줄까.





----------





윤은 큼지막한 화기에 이리저리 라일락 꽃대를 꽂아보고, 그러다가 몇 걸음 떨어져 멀리서도 바라보고, 다시 어레인지를 바꿔도 보며 한참을 공을 들였다. 금액에 제한이 없는 아주 커다란 와이드부케. 그것도 대형 화병에 꽂아두어도 될 법한 사이즈인데, 라일락과 냉이꽃으로만 구성해야 하는 이 주문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오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윤이다.

오늘 퇴근시간대에 픽업을 온다 하였으니,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아직 냉이꽃은 더하지도 못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어레인지를 바꿔대던 윤이, 드디어 조금 만족스러운 듯 멀찍이 떨어져 화기를 바라보며 살풋 미소지었다.





“사장님 드디어 초안 잡으셨어요? 아니 무슨 공을 그렇게 들이신대요.”

“아, 실장님… 하하. 이게 은근히 고민이 되네요. 저 냉이 좀 꺼내주시겠어요? 물올림 해놨는데 충분히 살아났나 모르겠네.”

“예 잠시만요-.”


처음부터 라일락으로 뼈대를 잡고, 냉이꽃이 사이사이 수줍은 듯 사르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어레인지할 참이었다. 그래서 큰 틀이 되어줄 라일락의 형태를 잡는데 더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냉이꽃까지 마저 다 형태를 잡고 나니, 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혔다.


“와, 끝이다.”


공을 들인 만큼, 근래 잡아본 부케 중 가장 만족스러울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다. 윤은 예약자의 이름에 철렁했던 며칠 전의 기억도 싸악 잊을 만큼 조금 기분이 들떴다.


이것저것 여러 리본을 대어보다, 오간자 소재의 미색 리본과 아주 얇은 시스루실크 소재의 보라색 리본을 겹쳐 꽃대를 돌돌 감쌌다. 완성된 부케를 품에 안으니, 꽤나 넓은 윤의 품 안에도 한가득 안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랬다.


“이런 꽃다발을 받게 되는 분은 누구실까 모르겠네.”


윤은 꽃이 시들지 않도록 다시 화기에 부케를 꽂으며 중얼거렸다.







“사장님, 저는 퇴근하겠습니다-.”

“네 실장님,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내일 뵐게요.”

“예. 그 꽃다발, 누가 가져가시는지 궁금했는데. 늦게 오셔서 아쉽네요.”

“제가 내일 어떤 분이었는지 꼭 들려드릴게요.”

“하하, 네, 좋아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평소였다면 윤도 퇴근을 해야 했을 시간이다. 8시. 픽업시간이 꽤나 늦었다.

여전히 몇 가지 꽃은 직접 보고 떼어와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최윤 사장님은 새벽에 꽃시장을 가야 했으므로, 씨엘드로브는 6시면 문을 닫았다. 픽업을 조금 늦게 해간다 해도 6시 30분이면 마감이었다. 마감시간 전 미리 퀵으로 받도록 하거나, 퀵을 받기는 어려운데 더 늦게 픽업을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제 직원인 박실장을 남겨두고 윤은 먼저 퇴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윤이 직접 남아 윤화평 고객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박실장은 정말 사장님이 남아계셔도 괜찮으시겠냐고 세 번을 물어보았다. 윤은 제가 너무 공을 들여서, 직접 드리고 싶네요-.하며 박실장에게 퇴근하시라 하였더랬다.


이 윤화평이 그 윤화평일리가 없지만. 아니 그 윤화평이 아니어야만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런 꽃을 선물하는 윤화평이, 그 윤화평이 아닌 편이 좋을 테지만, 그래도 이 윤화평의 얼굴이 조금 궁금해서.







끼익.

늦게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며 가만가만 책장을 넘기고 있던 윤이, 가게 앞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네이비라기엔 조금 밝고, 블루라기엔 조금 어두운, 푸른색의 SUV 차량 한대가 주차를 하고 있었다. 벤츠네. 차 멋있게 생겼다.

아, 꽃 꺼내놓고… 물주머니 작업 해두어야겠다. 잠시 손님의 차를 바라보던 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집에 가서 선물하시려는 걸까? 윤은 화기에서 부케를 꺼내어 작업대에 올려두고, 부케를 들고 이동할 동안 시들지 않도록 줄기를 꽂아둘 물주머니를 만드는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딸랑-.

윤의 가게 문에 달아둔 풍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세요-. 씨엘드로브입니….”


윤은 손님을 맞이하는 멘트를 하다, 물주머니의 모양을 잡던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윤아.”

“......”

“최윤.”

“......”

“잘 지냈어?”



윤화평.

그, 윤화평이었다.



윤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제 너무 그리워하다 못해 헛것을 보나 싶었다.

윤은 눈을 느리게 꿈뻑 꿈뻑 떴다 감았다. 그래도 눈 앞의 윤화평이 사라지지 않았다. 양손으로 두 눈을 꾸욱 눌렀다 떼어보았다. 역시 여전히 눈앞에 윤화평이 서 있었다. 윤이 그러는 양을 보던 윤화평이, 눈썹을 슬며시 팔자를 그리며 입술을 꾹 물고 웃었다.


“12년…만이네.”

“윤화평…….”


제 입술 밖으로 새어나가는 그 이름이 너무나 생소해, 윤은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응. 안 잊었네.”


안 잊었네,라니. 윤은 욕이라도 잘했으면 욕을 한 바가지는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윤화평.”

“응.”

“진짜… 윤화평이야?”

“그럼 진짜지, 가짠가.”

“내가 헛거 보는 거, 아니지.”

“......아니야.”


윤의 눈앞이 순식간에 어룽어룽해졌다. 제 눈물을 들킬까, 윤이 황급히 고개를 떨구며 작업대로 돌아섰다.


“그, 꽃다발, 물주머니만 끼우면 되거든. …바로 줄게. 잠시만.”

“윤아.”

“......”


윤은 화평의 부름에 대답이 없었다. 눈앞이 뿌얘진 탓에 물주머니를 잡으려는 손이 허공을 헛돌았다. 핑 도는 기분이 들어, 윤은 양손으로 작업대를 짚었다.


“윤아.”

“...금방 돼.”

“윤아.”


윤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잔뜩이었다. 화평은 다른 말이 없이 계속 윤의 이름만을 불렀다.


“...왜.”

“나, 안 볼 거야?”

“부케. 준비...하잖아….”

“나 봐, 윤아.”

“내가 빨리, 해줘야, 어서 가서 줄 거....”


윤은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울음을 목 뒤로 꿀꺽 삼켰다.


“윤아. 최윤.”


윤의 몸을 돌려세우는 손길이 있었다.


“왜 울어.”

“아니, 아냐. 눈에, 그냥 눈에 방금 뭐가 튀어서…….”


화평이 제 손으로 윤의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따뜻한 손은 12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윤이 겨우 마주 본 화평의 얼굴은, 조금 나이를 먹었을까… 그 외에는 그대로였다. 열아홉 윤화평, 그때의 그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채였다.


“나 안 급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catch up, 하자. 우리.”


윤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를 두 개 당겨왔다.

 






“너가 진짜 꽃집을 할 줄은 몰랐어.”

“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윤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중에 윤이 너는 꽃집 하면 좋겠다.’ 열아홉의 화평이 했던 그 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잘 어울려.”

“어… 고마워. 재미있는 것 같아. 생각보다 적성에도 잘 맞는지 좋아들 해주시더라고.”

“응, 잡지에도 나오고 그러던데. 유명한 플로리스트라고.”

“잡지를, 봤어?”

“응.”

“아… 그랬구나.”


윤은 멍하니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내가 플로리스트가 된 걸, 알고 있었구나. 잡지에 실렸던 것은 벌써 1년 전의 일이었으니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찾아온 것은 오늘이라는 상황이 가지는 의미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나? 나는, mechanical engineering… 그러니까, 기계공학? 전공해서 박사까지 마쳤어.”

“와, 박사님이구나. 그럼 미국에 계속 있었겠네.”

“응, 한국에는 두 번인가 들어왔나... 나 시민권자거든. 비자 문제도 없어서 정말 들어올 일이 없었어.”

“그랬구나….”

“어머니 아프셨을 때 잠깐 왔던 것 말곤 안 들어왔었던 것 같다.”

“어머님이 아프셨었어?”

“아-, 아아. 이제 괜찮으셔. 잠시 건강이 안 좋으셨었는데, 회복되셨어.”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걱정스러운 눈을 하자, 화평이 손사레를 치며 황급히 설명했다.


“그렇구나. 다행이네.”

“응. 아무튼, 운 좋게 학교에 자리가 나서 지난달에 귀국했어.”

“와, 학교에 자리 정말 없다던데, 서른한 살에 벌써 학교에 자리를 잡다니 대단하다. 근데 지난달에 왔으면, 정말 얼마 안 됐구나. ...어…?”

“응? 왜?”

“어, 아, 아냐.”


윤은 조금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어 눈을 도륵도륵 굴렸다. 1년 전의 윤이 나온 잡지를 읽었다는 그가, 고작 몇 주 전에 귀국을 했단다. 게다가 한국에 자주라도 들어왔으면 모를까, 지난 12년간 고작 두 번 들어왔는데.


“그럼 이제 한국에 자리 잡는 거야?”

“응, 그러려고. 그동안 한국 엄청 오고 싶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 왔네.”

“그랬구나…….”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화평은 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윤은 화평의 눈을 마주 보다, 이내 눈길을 돌려버렸다. 윤의 눈길이 닿은 작업대 위에는 덩그라니 물주머니도 달지 않은 채 놓인 꽃다발이 있었다.


“어, 아 꽃다발…!”


아차,하고 놀란 윤이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다 발을 헛디뎌 그대로 넘어질 뻔한 것을, 화평의 손이 잽싸게 낚아채었다. 쿠당탕탕-. 나무로 된 스툴 의자가 돌바닥을 때리고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윤아, 괜찮아?”

“어….”


윤의 팔을 단단하게 잡은 화평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무게를 지탱하느라 힘이 들어가 잔뜩 주름이 진 수트 자켓과, 손등 위로 툭 불거진 핏줄이 눈에 들어왔다. 입은 옷이 교복에서 고급스러운 정장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 말고는 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서른한 살의 윤화평은, 이런 모습이구나. 윤은 그 짧은 순간 동안 생각했다. 


“어… 이제 놔도 돼……. 나 꽃 포장해줄게. 진짜 늦었다.”

“윤아.”


팔을 슬쩍 비틀어 빼내려는 윤의 몸짓에, 화평은 윤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꾹,하고 더 주어 잡았다.


“아파….”

“아, 미안.”


팔이 눌려 통증이 느껴진 윤이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리자, 화평이 흠칫 놀라며 급히 제 손을 거두었다.


“…윤아.”

“......왜.”

“나, 안 보고 싶었어?”


윤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어, 작업대에서 시선을 거두고 저를 보는 화평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온 몸의 피가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화평이 이제 저를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걸까.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헛소리 잘하는 건 그대로네. 그런 말 할 거면 그만 가. 꽃다발 들고 찾아갈 사람 있을 것 아냐.”

“없어.”


없어,하고 답하는 화평의 목소리는 못내 단호했다.


“뭐?”

“없다고. 꽃다발 들고 찾아갈 사람.”

“그럼 저건 왜……”

“주고 싶은 사람 앞에, 지금 서 있어.”


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윤화평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지금 제가 듣고 있는 말과 같은 뜻일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찾아갈 사람, 없어.”

“...너…”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 윤아.”


윤의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에서 들리는 말들이 머리에서 해석이 잘 되지 않았다. 화평이 하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여전히 나를, 

그도 여전히 나를.





--------





열아홉의 화평은 오랜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노라 결심했었다.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었지만 화평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확신이 있었기에, 화평은 아버지께 솔직해져야겠다 결심했던 것이었다. 차분히 자신이 동성애자이고, 윤과 만나고 있음을 알렸다. 화평이 기대했던 것은 아버지의 격려와 지지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화를 주체하지 못한 아버지의 종일토록 이어진 매질과 언어폭력이었다. 그는 제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제 아들이 ‘소수자’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다.

화평의 아버지는 그 길로 화평의 미국 유학을 알아보았다. 비자 문제가 없는 데다 집안의 재력까지 더해졌으니, 당장 갈 수 있을 보딩스쿨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학 입시의 노선을 당장 변경하려면 포트폴리오며, 국내 성적표 제출이며, SAT 시험이며 필요한 것이 많았지만, 그것은 보내놓고 준비시키면 될 일이었으므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화평의 유학이 화평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동안, 화평은 윤과 연락을 할 휴대폰을 뺏긴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도 전화기도 없는 방에 주말 내내 꼼짝없이 갇혀있어야만 했다. 월요일에는 이미 모든 일이 정리된 후였다. 


“네가 만난다던 최윤이라는 아이. 아버지는 월급쟁이고, 어머니는 주부라지.”

“아버지…!”


화평의 아버지는 화평을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흠씬 두들겨 패고 정신적인 폭력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수그러들 아이가 아니었다. 기백이 있는 호랑이로, 제가 직접 그렇게 키워내고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으면, 고작 고등학생은 삶이 녹록지가 않을 게야. 게다가 지금 고3인데, 중요한 시기가 아니냐. 그렇지?”


윤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지만, 그래 보았댔자 화평의 아버지가 지닌 인맥을 동원하면 정리해고를 당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화평도 그것을 잘 알았다. 역시나 ‘고작 고등학생’인 화평은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화평이 월요일에 등교했던 것은, 오로지 자퇴수속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윤과 작별인사라도 나누기 위해서.


“윤아, 우리… 헤어지자.”


그렇게 말하지 말 것을 그랬나, 다르게 말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화평은 윤과 헤어지던 그 날을 수백 번도 더 되새겼었다. 제 팔을 잡으려던 윤의 손을 피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다. 아버지에게 맞아 온몸에 피멍이 들어 스치기만 해도 몸이 아팠다. 본능적으로 몸에 닿으려는 손을 피했는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윤은 그것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윤의 눈이 그렇게 슬퍼 보일 줄 알았더라면, 꾹 참고 잡혀줄 것을.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뒤늦게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화평은 윤과는 또 다른 이유로 악착같이 공부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부동산으로 많은 돈을 번 탓에 가방끈은 짧았던 화평의 아버지는, 항상 학계에 집착이 있는 사람이었다. 화평은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시는 교수가 되어드리고 제 인생을 살겠다 다짐했다.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고, 석사를 마치고 공백 없이 박사과정을 들어갔다. 연구중독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화평은 연구실에서만 살았다. 오죽하면 지도교수가 화평의 건강을 걱정해 줄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였는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화평은 연애는커녕, 그 흔한 데이트 한 번 하지 않았다. 화평에게 무성애자냐 묻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고자냐는 농을 건네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만 화평의 연구실 책상 한켠에 언제나 붙어있는 사진이 한 장 있어, 나중에는 모두들 첫사랑을 못 잊었나보다, 어지간했나 보네,하고 말았다.




어느 날은 앳된 얼굴이었던 그 사진 위로 꽤나 어른스러운, 하지만 분명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사진이 덧붙여졌다. 잡지를 오려낸 사진이었다.


“Daniel, didn’t know he was a florist. (화평, 그 사람, 플로리스트인 줄은 몰랐네.)”


내추럴한 쉐입의 커다란 부케를 양손 가득 품에 안고 따뜻한 얼굴로 웃고 있는 윤의 인터뷰 사진.


“Yes, I guess he is. Didn’t know he might actually be a florist, either. (그래, 그런가 봐. 나도 그 애가 정말 꽃집 사장님이 될 줄은 몰랐는데.)”




친한 한인 박사생이 보던 한국 잡지에서 윤을 발견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 홍주누나. 나 이 페이지, 주면 안 돼요? 내가 커피 살게.”

“뭐야, 윤화평 꽃꽂이에 관심 있었니? 의외네.”

“주는 거죠? 응?”

“그래, 뭐 안될 건 없는데. 대신 스콘도 같이 사와야 해.”

“물론입죠 누님.”

“오오냐.”





윤의 소식은, 아주 가끔씩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자리를 잡고 윤에게 찾아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사이 다른 누군가 아주 좋은,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결국 윤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한 벌이라고 생각하면 되었으므로.

하지만 윤은 화평의 바람과는 달리 그리 잘 지낸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플로리스트로서는 꽤나 성공하게 되었지만, 만나는 사람들과 모두 끝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했다. 데리러 갈 것이라 다짐은 했지만, 마음 아프게 지내기를 바란 적은 한순간도 없었는데. 내가 가진 것이, 힘이 부족해서. 화평은 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너무 분했다.

 


“아버지, 제가 교수가 되어 돌아오면, 제 삶을 건드리지 않으신다 약속하셨죠.”

“...그래, 그랬다.”


화평은 아들이 보고 싶다는 화평의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며칠 여행을 온 아버지에게 선언하듯 물었다. 아버지는 화평이 무얼 묻는지 알겠다는 듯,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다.


“약속, 꼭 지키세요.”

“......”

“지키지 않으시더라도, 소용없어요. 그럼 저도 아버지, 어머니, 가족 모두를 버리고 제 삶을 살면 되니까. 품 안의 자식이 아니게 된 건 이미 오래전이었던 것, 알고 계시죠.”

“......그래.”







화평이 박사가 끝나고 몇 개의 논문을 더 마무리하였을 즈음,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에 자리가 기적처럼 생겼다. 게다가 학교는 젊은 유학파를 원했고, 학교의 니즈와 화평이 가진 스펙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에 귀국이 확정되었다.


짐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난 후 화평이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은 윤이 하고 있다는 꽃집이었다. 

정작 귀국을 하고 보니, 윤에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난 12년간 너를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그때는 미안했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사랑한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화평은, 윤의 가게에 꽃다발을 주문했다. 품 안에 꽃을 가득 안은 윤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 ‘사장님 품 안 가득 찰 만한’ 크기로 해달라는 이상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지금, 윤을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그 순간이 되었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 윤아.”


윤의 눈동자가 점차로 흔들리다,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내 능력으로는 이게 제일 빠른 거더라고.”

“윤화평.”

“설명할 것, 이해시킬 것, 말해줄 것 다 생각해놓았는데… 왜 지금 생각이 하나도 안 나지.”


화평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하하 웃으며 윤의 작업대 위에 놓인 부케를 들어 윤에게 건넸다.


“윤아, 네게 지난 12년, 매일, 매시간, 매 순간… 말하고 싶었어.”


윤의 두 뺨은 이미 눈물로 젖어있었다. 화평은 윤의 손을 들어 부케를 그 품에 안겨주었다.


“예쁘다. ...누가 꽃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네.”


열아홉 윤화평이, 열아홉 최윤에게 했던 그 말.

윤이 잊어본 적 없던 그 말.


윤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소리 내어 푸흐흐, 웃었다.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꾹, 꾹, 눌러 열아홉 최윤이, 열아홉 윤화평에게 했던 대답을 하곤 라일락 꽃들 틈으로 얼굴을 묻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는 것은, 열아홉의 최윤이었다.


화평은 윤의 뺨을 어루만지다 윤의 품 안에 있는 부케로 손을 옮겼다. 처음 손이 닿은 곳은 냉이꽃이었다.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화평은 조용히 읊조리며, 이번에는 손을 흰색 라일락에 얹었다.


“우리 아름다운 맹세를 할 수 있을까요.”


윤이 눈물로 잔뜩 젖은 얼굴로 화평을 한 번 바라보고, 화평의 손을 따라 부케로 시선을 옮겼다. 화평의 양 손이 마지막으로 라일락들을 크게 감쌌다. 화평은 이제 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첫사랑.”


윤의 두 눈은, 또 한 번 고장 난 수도꼭지가 되어버렸다. 푹 떨군 윤의 얼굴을 양손으로 들어 올린 화평이, 찬찬히 윤의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윤아, 나 마음 아퍼. 그만 울어.”


화평의 다정한 목소리에, 윤이 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제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화평이 맞는지 확인하듯 두 손을 들어 화평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 윤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윤은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제 손가락으로 화평의 얼굴을 그려보듯 이마부터 턱까지 찬찬히 쓸어내렸다.


“화평아.”

“응.”

“윤화평….”

“응….”

“진짜 윤화평이지.”

“응, 윤아.”

“왜 이제야 왔어…… 나 오래, 아주 오래 고장, 나 있었는데……”


고장이 나 있었다는 윤의 말에, 화평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어서….”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왔으니까. 그러니까 됐어. 괜찮아.”


울음을 꾹 참는 목소리로, 윤이 힘을 주어 말하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사랑해, 윤아.”

“…나도… 나도, 사랑해.”


화평은 눈물로 젖은 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꼭 12년 만의 키스는, 그때처럼 라일락 향이 났다.

 







난 당신을 매일같이 기다리면서 죽어갔어요.

그대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는 줄곧 내가 당신을 찾으리라는 것을 믿었어요.

시간은 내게 당신의 마음을 가져다 주었어요.

난 천년동안 당신을 사랑했고,  또 천년 더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 몇가지 사족들



1-1. 라일락과 냉이꽃은 이렇게 생겼어요.





1-2. 라일락의 공통 꽃말은, ‘첫사랑’입니다. 보라색 라일락은 ‘사랑의 싹이 트다’, 흰색 라일락은 ‘아름다운 맹세’예요. 그리고 많이들 들어보셨을 냉이꽃의 꽃말은 ‘봄색시,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입니다. 화평이 윤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모두 엮어 만든 부케였죠.



2. 윤이 확장 이전한 현재의 씨엘드로브는 이런 느낌입니다.





3. 와이드부케는 부케를 오밀조밀하고 동그랗게 잡는 대신 넓고 내추럴하게 펼쳐지는 느낌으로 잡은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에요. 큼직해서 품에 안으면 한 아름 가득 안게 되는 스타일입니다.




 

4. 화평의 영어이름으로 사용한 Daniel은 화평본체 배우님의 세례명을 살짝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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