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수박화최

한겨울의 수박화최

교자
@sontheyun_
사공
-
푸딩
@blossoming0_0
@reum_gu3st
Abodo
@8Abodo
조개빵
@im_madeleinenim
무르달
@26_12_12
한세
@Dvsmmsro
구돗개
@9dot_dog
이수린
@01015260631__
소브
@sob_taste
뇸뇸
@theguest_jy
레로리
@rerori_ssul
설이님
@gakkseolii
블랑인블루
@blanc_en_bleu
청하리
@wjdpduq3
B
@Bee_chezmoi
샤샤
@Cecillia_shasha
왕자
@Miss__JN
화예랑
@hwayerang
폴린
@p_sont9
뱁쌔
@R3DB14D
파도
@wave_theguest
고양이선생님
@drcat1026_19
익명의 누군가
-
찬손
-
노넴
@STG_no__name
고독한 파티광
@honolulu_b
킷츨
-
익명(@u-)
-
모아
@Lu__Moa
조선
@z0sun___
도톰
@Y_MI_doing_this
자루
@PA_TAN__
사마
@sama_pangin
기양
@woo_gu09
도롱
@do_r0ng__
익명
-
오이절임
@oijeolim
녹차
-
임자
@ggonggew
앵꼬
@engggo_twt
갱고
@GAENG_GO
마뮤묘
@mamyu_myo
6B
-
잉여A
@A_vilal
제로
@00__yoon
가지
@EGGP1_ANT
ON
@on_son_1
두영
@NANJJANGIG
모도
@open_modoK
모모
@momoyoon00
쉐뇨
@sueno_de_sueno
Credits
자루
리카
교자
사마
사공
푸딩
기양
도롱
Abodo
조개빵
익명(o-)
무르달
오이절임
제로
가지
한세
구돗개
이수린
녹차
소브
뇸뇸
설이님
블랑인블루
ON
두영
청하리
B
샤샤
모도
임자
엥꼬
삼삼
왕자
화예랑
폴린
HEE
갱고
레로리
뱁쌔
파도
고양이선생님
익명의 누군가
킷츨
찬손
노넴
고독한 파티광
익명(@y-)
쉐뇨
마뮤묘
익명(@u-)
모아
조선
모모
6B
도톰
마모
잉여A
피로
참여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연습 때 봬요.

“윤씨도 수고했어요.


윤은 낡아서 칠이 조금 벗겨진 토슈즈와 따뜻한 녹차가 담긴 보온병을 가방에 넣고 연습실을 나섰다.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대충 꺼내 신고 신발 앞 코를 바닥에 쿡쿡 두드리면 엄지 발가락에 든 멍이 욱신거렸다. 크지는 않지만 거슬리는 통증에 윤은 살짝 인상을 쓰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제 겨울 다 됐네.

숨을 내쉬면 허옇게 퍼지는 윤의 숨결은 겨울이 한결 깊어 졌음을 알려주었다.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가는 길. 창틀에 턱을 괴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면 하루 일과가 찬찬히 스쳐 지나간다. 


Enchanter 


‘상용 시립 발레단 최 윤. 10년 차에 은퇴 다가오나.

‘상용 시립 발레리노 최 윤. 교통사고 후유증 크게 앓아

‘발레리노 최 윤, 사고 이후 첫 공연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

안무 연습 쉬는 시간. 윤은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며 자신의 기사를 찾아본다. 윤의 시선이‘은퇴‘라는 단어에 오래 머문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깨물다가 가벼운 도리질을 치곤 토슈즈 끈을 고쳐 묶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격정적인 Danse Macabre. 시작은 부드러운 플리에, 턴 그리고 아라베스크. 얄쌍하지만 힘있는 윤의 몸짓은 금세 연습실 안에 빈틈없이 들어찼다. 점점 격해지는 안무. 턴아웃 스텝을 밟을 때면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것 같이 아려오는 통증에 이를 꽉 앙다물고 악착같이 버텨내곤 했다. 음악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쯔음, 거울로 연습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모습이 비쳤다. 윤은 음악을 멈추고 조금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면서 머리를 넘기며 뒤를 돌아봤다. 


“공연 날짜 얼마 안 남았지?

“네. 이제 2주 정도.

“준비 하느라 힘들지? 맞춰봐야 할 것도 많고, 게다가 아직 너는,


실장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아프니? 무릎.

“아주 가끔 그래요. 괜찮아요.

“치료는 꾸준히 받고 있고?

“네.

“그래도 말이다. 혹시 정신… 적으로 너무 힘들거든, 이 사람 한 번 찾아가봐. 내가 공연 전에 다른 애들 많이 데려갔었다. 긴장 덜으라고.

윤은 실장이 건네는 명함을 받아 들자마자 본체만체 하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돌아가는 그를 배웅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바를 그러쥐는 윤. 순간 무릎에 스파크가 튀듯 통증이 어렸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문지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

4년 전. 

윤은 최연소로 시립 발레단에 입단해 그 주가를 톡톡히 올려가던 발레리노 였다. 쟤가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나이도 어린데 다음 공연 주역 이라더라. 하는 소문들이 단원들 사이에 파다했다. 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지만 질투와 시기 어린 목소리로 윤을 질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윤의 토슈즈를 훔쳐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하고 연습을 하고 있을 때엔 연습실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텨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무대에 서야 했으니까. 

공연 전 날, 밤 늦게까지 막바지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어 건너려는 순간 누군가가 등 뒤에서 윤의 팔을 잡아 당겼다. 몸을 돌려 바라보면 자신을 유독 괴롭히던 단원이었다. 

“이거 놔.

“이거, 놓고 얘기하라고. 좀.

“네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애가 굴러들어와서는 입단 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주역이나 맡고.

“나는 입단한지 4년 짼데 그런 역 하나 맡기 쉽지 않았다고. 대체 넌 뭔데. 어? 돈이라도 먹였냐?

악에 받쳐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을 뱉는 그의 모습에는 서러움 또한 묻어있었다. 

“그럼 너도 나처럼 연습해. 발톱이 들리고 매일매일 양말에 핏물 배어 날 정도로 연습하라고.

“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노력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유치하게 괴롭히기나 하고. 이거 놔. 그리고 나한테 말 걸지마. 짜증나니까.

윤은 제 팔에 힘을 실어 눌러 잡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멍하니 서있는 그를 향해 살짝 비소를 짓곤 그를 뒤로하고 초록불이 아슬아슬하게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건너려 발을 떼는 순간. 

어느 새 윤의 몸은 밀쳐져 바닥에 나뒹굴어있었다. 손바닥이 까져 핏방울이 맺혔다. 

“이런 미친 새끼가!

몰상식한 그의 행동에 화가 난 윤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그 찰나,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고 큰 경적 소리, 헤드라이트, 잔뜩 겁에 질린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윤의 시야는 점멸했다. 

눈을 뜨면 윤의 다리는 깁스를 한 채 고정되어 있었고 자신이 아직 생명을 부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심전계 소리만이 제 귓가를 맴돌았다. 

그 후로 4년, 윤은 피나도록 재활치료를 하며 꾸역꾸역 바닥부터 기었다. 자신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 새 동정의 눈길로 변해있었다. 다른 단원들 사이에 자신을 밀친 그는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찬 연습실 바닥에 누워 잠들어있는 제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오후 7시. 내가 미쳤지. 잠이나 자고. 몸을 일으켜 텀블러에 담긴 따뜻한 녹차로 언 몸을 녹였다. 

문득 실장에게서 받은 명함이 머리에 스쳐 주머니 속에서 명함을 꺼냈다. 

‘임마누엘 음악 치료 상담소. 윤화평. 음악 치료. 힐링.‘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빤히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명함 속 전화번호로 다이얼을 꾹꾹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에도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끊으려는 때에, 휴대폰 너머로 직원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마누엘 음악 치료 상담소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예약 좀 하려고요. 평일..

“평일은 남는 시간이 없고요. 이번 주 주말 오전 10시에 시간이 비는데 그 때로 잡아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윤은 통화가 끊긴 휴대폰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방을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

토요일 오전 10시. 

윤은 상담소 문 앞에서 발을 달싹이던 것도 잠시, 문을 열고 들어선다. 

“어떻게 오셨어요?

“10시에 예약했는데요.

“최 윤씨? 저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진회색 벽지에 상반되는 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가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그의 이름 석 자. 

‘윤화평

그는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윤과 눈을 맞추며 살짝 미소를 지어왔다. 편하게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는 그와 시선을 슬쩍 피한 채 자리에 앉은 윤은 두리번거리며 방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어.. 그게.

“편하게 얘기 하셔도 돼요. 커피 드시죠?

어르고 달래주는 듯 부드럽고 나즈막한 화평의 목소리는 불안정했던 윤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화평은 윤 앞에 커피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이내 윤의 손에는 온기가 어렸다.  윤은 조금씩 긴장을 풀고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씩 화평과 시선을 맞추며.   

“자꾸 누가 절 등 떠미는 것 같아요. 아, 절벽 위에서요. 뒤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요. 그리고,

“그리고요?

“자꾸 옛날 생각이 나요.

윤은 자기 입으로 이야기 하면서도 생판 처음 보는 남자에게 자신의 치부이자 과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화평은 손가락에 볼펜을 낀 채 턱을 괴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윤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윤의 이야기보다 그저 제 앞에 앉은 사람을 눈에 담기 바빴기에. 

“많이 힘드셨겠네요.

윤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에 있는 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방 안 가운데에는 진한 붉은 색의 러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웅장한 검은 그랜드피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책장에는 진료기록으로 보이는 수많은 파일들과 책들이 꽂혀 있었다. 화평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윤을 바라보았고 윤은 머뭇거리다 옆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공간은 문 너머로 먹먹하게 들려오는 잔잔한 선율의 음악이 자리했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복잡해요.

“지금 드는 생각대로 피아노를 연주해보세요. 꼭 어떤 곡을 연주해야 되는 건 아니에요. 자유롭게.

윤은 화평의 황갈색 눈을 한 번 바라보고 오른손을 조심스레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손가락 끝으로 건반을 매끄럽게 쓸다가 건반 한 개를 꾸욱 내리눌렀다. 잔잔한 울림이 윤의 손가락 끝으로 파고들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맨 높은 음부터 낮은 음까지 차례로 건반을 쓸어내리는 윤의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어렸다. 

화평은 그런 윤의 모습을 눈에 짙게 담았다. 윤의 상태를 찬찬히 바라보며 진단하는 것이었다. 연주해보라는 말에 머뭇거리는 모습, 아랫입술을 씹어대는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다음 상담 시간은 언제든 편하실 때 들러주세요. 시간 빼 놓을 테니까. 여기로 연락 주시면 더 빠르고요. 제 개인 번호요.

화평이 건넨 종이를 받은 윤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화평이 입술을 뗐다. 

“아 그리고,

“팬이에요.

그 말에 어째선지 얼굴이 달아오른 윤은 황급히 도망치듯 상담소를 나왔다. 입꼬리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채 서 있는 화평을 뒤로하고 닫히는 문 사이로 화평의 욕망어린 눈길이 윤의 등에 박혔다. 


연습실. 오후 5시. 공연 D-5.

윤은 화평이 건넨 종이 쪽지에 시선을 가두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한참이나 멍한 모습인 윤의 어깨를 툭 치는 실장. 

“내가 알려준 곳 다녀왔나봐?

그의 말에 윤은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 압박 붕대를 꽁꽁 둘러맨 제 무릎을 괜히 툭툭 친 후 다시연습에 몰두했다.  

어째서일까? 춤을 추면 출수록 허망한 생각들이 윤의 머릿속에 들어찼다. 막 처음 입단해 멜로디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며 반짝이던 윤은 온데간데없고 길 잃은 탁한 눈빛의 한 사내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음악을 멈추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작은 땀방울들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면 어느 새 오후 7시. 그리고 부재중 전화 2통. 

누구지? 낯익은 번호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걸면 신호음이 짧게 이어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네. 부재중으로 전화가 와서요. 모르는 번호라. 누구시죠?

“왜 모르는 번호에요?

“네?

“저에요. 윤화평.

그의 말에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화평이 건넸던 자그마한 종이조각을 펼쳐본다. 아. 

“죄송해요. 제가 번호를.. 아, 근데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실장님께 물어봤어요.

“아. 저, 제가 이제 공연이 얼마 안 남아서요. 상담은 아무래도…

“괜찮아요. 상담 때문에 전화한 것도 있는데. 그냥 밥이나 먹자고 전화했어요.

“어디...에서.

“사실 지금 윤씨 연습실 앞이에요.

그의 말에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1층을 바라보면 정말 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봤어요. 지금 내려 갈게요.

전화를 끊고 겉옷을 걸친 후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윤의 양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즐거워 보이기 까지 했다.  

화평은 차에서 내려 차 문에 기대고 섰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멀찍이 윤의 모습이 비치자 옅은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춥죠. 타요.

화평은 윤에게 문을 열어주고 돌아와 안전벨트를 맸다. 한 손을 말아쥐고 창틀에 턱을 괸 채 핸들을 잡는 화평. 윤은 그의 옆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제 크로스 백 끈을 매만졌다. 차가 멈춰선 곳은 어느 레스토랑 앞. 둘은 차에서 내려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윤은 창 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물잔을 매만지며 묵묵히 정적을 지켰다. 먼저 입술을 뗀 건 화평이었다. 


“요즘은 어때요?

“지금 여기서 상담하시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윤은 순간 나한테 관심 있어요?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한 것을 꾹 참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연습하느라 정신 없죠, 뭐. 사실 요즘 뭐 때문에 발레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화평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윤을 바라보다 직원을 불러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과 음식이 나오고 화평은 윤의 와인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의 잔이 부딪히는 투명한 소리가 났다. 화평은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혀 위에서 굴리며 음미하다 목 뒤로 넘기며 윤을 바라보았다. 윤은 그런 화평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고 눈을 음식에 고정시켰다. 화평이 보기에 윤은 아직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 했다. 정처없이 과거 속을 떠도는 길 잃은 사내 같았다. 그를 그 심해 속에서 끌어올리고 싶었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 싶었다. 스테이크를 써는 윤의 손이 버벅거리자 화평은 먹기 좋게 썰어놓은 제 것을 윤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죠?

“뭐가요?

“공연 말이에요. 저 티켓 샀거든요.

“아.

“그러고보니 공연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그의 말에 음식에 시선을 묻었던 윤이 살짝 고개를 들어 화평을 바라본다. 화평은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뭐 때문에 춤추는지도 모르겠고 긴장되고 그러면. 그냥 그 날은 저를 위해 춤 춰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해서. 저 하나뿐이니까.



‘그게 어떻게 편하겠어요.

 윤의 집으로 가는 길. 눈이 내렸다. 화평은 부러 잔잔한 노래를 틀어 적막을 녹였다. 윤은 취기가 올라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창문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가 윤의 집 앞에 멈춰섰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조금 비틀 거리며 돌아가는 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화평은 차에서 내려 윤의 이름을 불렀다. 

화평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다짜고짜 화평이 얼굴을 들이밀어 윤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을 맞춰왔다. 두 사람의 머리 위 겨우살이 나무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갔다.  


공연 당일. 3시간 전. 

입을 맞춘 그 날 이후로 윤은 화평을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전전긍긍했다. 먼저 사귀자는 말도 안 하고. 행여 그의 연락이 오기라도 하면 일부러 늦게 답하거나 되도 않는 이유를 둘러대며 피하기 바빴다. 화평이 그런 윤의 마음을 모를리 없었다. 오히려 연습실 앞으로 찾아가면 당황해 허둥대는 윤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1시간 전. 관객 입장 시간. 

윤은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비롯해 스타일링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했다. 거울을 보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의 얼굴이 비쳤다. 

‘정신 차리자.


공연 시작. 

윤은 무릎에 파스를 잔뜩 뿌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사고 이후 오르는 첫 무대. 대중의 관심은 시작 전부터 뜨거웠다.  윤은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쓰릴 정도 였다. 그 누구보다 올라야만 했고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왔던 무대였건만 오늘만큼은 도망치고 싶었다. 지레 겁을 먹은 윤은 커튼을 살짝 들춰 수많은 관객들의 눈동자를 훑었다. 저 눈들이 자신을 흠잡아 끌어내릴 거라고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곧 윤이 무대 위로 올라설 차례.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선지 무릎도 평소보다 더 시큰거리는 듯 했다. 동료 단원들의 연기를 바라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 쯔음, 문득 화평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위해 춤 춰주세요.

드디어 윤의 차례. 그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눈에 힘을 주어 감았다 뜨면 객석의 수많은 관객들은 온데간데 없고 객석에는 단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고요한 무대에 흐르는 음악을 헤치며 윤이 무대 중앙으로 발을 디뎠다. 윤의 몸은 얇고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무대를 노닐었고 그의 몸짓은 넓은 무대에 빈틈없이 들어찼다. 윤은 그 사람을 향해 살풋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도 마주 웃어왔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Enchanter 完.


'Writing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리 벽  (0) 2018.12.21
별 헤는 밤  (0) 2018.12.21
두 번째 재회  (0) 2018.12.20
탈선의 아가페  (0) 2018.12.20
십이야(十二夜)  (0) 2018.12.19